다가왔던 귀한 기회를 놓친 절망감

2006.10.05 06:15

노기제 조회 수:640 추천:127




   중학교 때 어느 수업 시간에 들었던 말씀이다. 기회란 놈은 머리가 온통 대머린데, 유독 앞이마 쪽에만 머리칼이 좀 붙어 있어서 내 앞으로 다가올 때 잽싸게 움켜잡아야지 그 순간을 놓치면 결코 잡을 수가 없다고. 그 녀석 뒤통수엔 잡을 만한 머리칼이 없으니까. 아차 하는 순간 휙 지나쳐 사라진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뼈에 사무치게 생각이 난다.

         마음이 온통 시로 물들어 버린 아름다운 사람이 내 문학서재를 찾아 왔었다. 주인인 나 자신도 문을 안 열어 본 '손님창작방' 에 조용히 들어와 텅 빈 허술한 방을 꾸며 놓고 나갔다. 서재에 들어가 스쳐 지날 때도 문 열어 볼 생각을 안 했던 방이다. 대부분 문학서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사랑방에 들러 한 마디 인사를 떨구거나, 주인 창작방에 올려진 글들을 읽고 나간다. 간혹 아주 가까운 친구가 글 읽은 소감을 짧게 남겨 방을 따사롭게 온기를 주기도 한다.

         사실 손님창작방의 용도조차도 생각지 못했었다. 나의 눈길을 받지 못하던 그 방에 신경이 쓰인 날, 특별한 생각 없이 그 방문을 밀어보니 쉽게 열린다. 아니 그런데, 내 이름 석자, 그것도 옛날 학교 때 불리던 이름까지 쌍으로 불러서 깍듯이 입회 인사를 올린 후 시 한 수 곱게 놓여 있었다. 그 해 여름부터 마음 속 어디선가 헝클어져 딩구는 시어들을 하나씩 끌어내기 시작해 마침내 시 짓기를 시작했다는 설명과 함께.

         중학 동창 신동해씨다. 그가 먼저 내 방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동창 사이트에 올린 그의 글에 댓글을 달아 논 내게 고마운 마음으로 답방 왔던 것을 그의 설명으로 알았다. 북한산친구란 애명으로 산에 오르기를  사랑하는 그의 취미가 보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교류는 나의 한국 방문 시 부고17 동기 산악회에서 시작되었고 글쓰기로 이어졌던 것이다.

         사람은 다 똑 같다는 것을 새삼 알았다. 누구나 혼자인 것이다. 그래서 외롭다. 자신의 어떠함을 아는 척 해주는 사람에게 무조건 마음이 쏠린다. 그리고 조금 더 나를 보이고 싶다. 더 보이면 조금 더 나를 알아주고 함께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린 글쓰기를 좋아하는 공통점으로 대화를 이어 갔다. 쓴 글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자 했다. 아니, 힘을 얻고자 했던 것 같다.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문학에 대한 열정. 쓰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는 욕망. 다 토해 내고 난 후의 부끄럼 같은 것을 함께 나누고자 했는가 보다.

         글쓰기를 나보다 한층 더 사모했던 그의 처음 마음에 칭찬을 아꼈던 것을 지금 난 후회하고 있다. 수필을 쓰는 내가 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말을 아꼈던 것이다. 처음엔 무조건 칭찬으로 용기를 주어야 했던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아무 소용이 없는 깨달음이다.

         안부를 묻는 편지에 기쁨이 넘치는 회신을 보내왔다.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두어 준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스스럼없이 자신이 투병중임을 알려왔다. 담도 관이 막혀 몸에 백을 차고 살아야 하는 불편함. 그러나 자신은 큰 병을 앓는 환자는 아니라는 당당함을 알려 왔다. 덩달아 나도 그가 환자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후 고교졸업 사십 주년 기념 여행에 참가 차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도 살며시 그의 동향을 알만한 사람에게 묻기만 했다. 어차피 가는 인생인데 병치례에 있는 돈 다 없앨 필요 없다며 전문적 치료를 사양하고 투병중이란 소식을 들었다. 고개 끄덕여 동감했다. 남을 식구들에게 뭔가 좀 남겨주고 싶은 가장의 마음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런 그의 상황이 어쩐지 내겐 심각하게 느껴지질 않았다. 깔끔하고 확실한 그의 판단에 온전히 동의하며 마음으로 박수를 보냈다. 곧 회복해서 다시 우리와 산행을 하게 되리라 믿었던 탓이다. 그 때가 그를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을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리도 한가롭게 다음 기회를 기다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일년 반을 보내며 궁금타 편지를 써도 회신이 없고, 내 문학서재에 다음 작품이 오르길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다. 급한 맘에 전화를 걸어봐도 집 전화, 손 전화 모두 받는 이가 없다. 왠지 다급해지던 내 마음. 한 달 남짓 후면 다시 동창들 모여 추억여행을 떠난다. 이번엔 함께 가자고 졸라 보리라 마음먹고 동창사이트 게시판에 큰소리로 그를 불렀다. 누군가 그와 연락이 되는 친구라도 찾아서 만나고 싶었던 거다.


         내가 그를 찾는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할 것이다. 아픈 사람이 기뻐하면 병이 나을 수 있다. 회복할 수 있다고 믿음을 주고 싶었다. 그리곤 우리 친구들 작은 마음을 모아 제법 큰사랑을 전한다면 그가 정말 행복해 질 것이다. 그 행복감이 그를 병에서 뛰쳐나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내 숨이 가빠지는 것을 느끼며 이런 마음을 빨리 그에게 알리고 싶었다. 누구든 서울에 있는 친구, 가까이 사는 친구, 어서 이 소식을 그에게 알려주길 바랬다.


         먼 이국 땅 미국에서도 한국에서 투병중인 자신에게 보내는 뜨거운 응원이 있음을 그가 알기를 원했다. 그래서 외롭다 생각지 않고, 따뜻한 세상에 건강하게 복귀하고픈 열망을 가져주길 내가 갈망했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니까 살아야겠다고 안간힘을 써 주길 내가, 글쓰기 친구인 내가 원했는데.


         애타게 그를 찾고자 한지 열 훌 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다. 아차, 한 발 늦었구나. 그래서 내 맘이 그리도 서둘렀던 거였구나.


         그를 사랑했던 우리들의 마음을 그가 가슴에 갖고 떠났기를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에 내 바램을 전하며 손님창작방에 장식된 그의 시 한수 옮겨 본다.



                         초겨울 비
                                      신동해

                늦가을
                오색단풍의 뜨거움이
                하늘을 데폈나
                초겨울 비 나린다
                차가움에
                떨어진 단풍불
                바람에 날리어
                홀로
                낙엽 헤치며 거니는
                여인의
                우산을 덮으니
                싸늘하게 식은
                여인의 가슴
                다시
                불을 지피려나

                2004.11.10. 북한산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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