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세요

2004.05.02 07:28

노기제 조회 수:513 추천:102

101800 고치세요
노 기제
"솨아......"하고 파도가 밀려나가는 소리다. 큰길을 향한 벽 전면이 유리로 된, 우리집 거실에 앉아있는 내 귀에 들린다. 바닷가에서나 들을 수 있는 파도소리를 흉내낼 아무것도 지금은 없다. 긴장하며 밖을 휘이 둘러보지만 별로 그럼직 한 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다시 안쪽으로 돌리는 내 시선을 붙잡는 것이 있다. 길가에 심겨진 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떨기 시작했다. 무엇을 떨어버리려는 몸짓이다. 아하 바람이 찾아 왔구나.
비가 온 것도 아닌데 깨끗하게 물 청소를 한 듯 마알간 길에서 차가운 가을을 본다. 버려야 할 잎새들을 떨구도록 바람이 도와주고 있다. 아직은 때가 일러서, 아직은 못 버리겠다고 안간힘을 쓰는 나무들의 몸부림이 문득 에밀리의 음성과 합주를 한다. "언니, 성질 좀 고쳐요. 믿는 사람인 우리들의 성품이 변해야 되잖아요. 버릴 건 버려 야죠."
요 며칠사이 부쩍 저려오는 팔다리가 심상치 않아 자문을 받을 요량으로 말 좀 부쳤다가 한방 호되게 맞은 셈이다. 평상시의 내게 불만이 있나보다. 대뜸 자기가 경영하는 한의원으로 와서 치료를 받으란다. 내가 가진 보험이 어떨는지 몰라 대답을 얼른 못했더니 돈걱정 말고 무조건 치료부터 시작하란다. 졸지에 중환자 취급을 받으며 침 치료가 시작됐다.
나는 요즘 어떤 자세로 잠을 자던지 왼쪽 팔이 심하게 저려와서 잠을 깨곤 한다. 가끔 다리까지 조금씩 저리다. 어깨를 타고 올라와 얼굴 왼편이 밀가루 반죽을 붙여 놓은 듯 쩌릿쩌릿 하며 남의살같다. 가끔은 골치가 아프기도 하고 때론 머리 한복판이 팽창해서 터질 듯 불편하기도 하다 .평균 내 혈압은 60/90 정도로 저혈압이다.
우선 음식에서 소금을 일절 제하고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란다. 뭔 꼴을 못 보는 그 직선적인 성격을 다스려보란다. 마음은 따뜻하고 사랑이 있지만 백 번 잘하면 뭐 하냔다. 한번 쏘아대는 속사포에 백 번 잘했던 공로 다 무너뜨린단다. 자신에게도 나쁘고 남에게도 절대 덕이 안 되는 성질이니 고치라는 엄명이다.
좀 막연한 지적이지만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인정을 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면을 고쳐야 하는 건지 감이 안 잡힌다. 매순간 내가 한말은 내가 책임을 지는 한도 내에서의 말을 하려 노력하며 산다. 아마 내가 세운 표준이 남의 표준과 같지 않으니 내가 해도 된다고 생각한 말이라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할 우려는 언제나 있다. 그렇다면 고쳐야 할건 성질이 아니라 표준이겠다.
차근히 생각해 보자. 내가 못 참는 것은 거짓말이다. 빤히 보이는데도 눈 똥그랗게 뜨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난 상대하기를 거절한다. 가장 심하게 고쳐야 할 점은 나처럼 말하지 않는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그리 잘난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적어도 나처럼은 생각하고, 나처럼은 말하고, 나처럼은 행동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나에게 최면을 걸어 논 것이 중증이다.
그리고 보니 정말 고쳐야 할 성격이 생각난다. 나는 누가 한가지 일로 두 번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한 번이면 알아듣기 때문이다. 두 번 까지는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되고 네 번 되면 목소리가 상승한다. 그러니 누가 똑같은 일로 내게 두 세 번 물어오면 난 그만 신경질을 내고 만다. 신경질이 나는 이유에는 나는 알아듣는데 너는 왜 못 알아듣느냐는 질책이 숨어있다. 나의 표준으로 모두를 끌어들인다. 내가 아닌 그들의 그대로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이다. 나처럼 되어 보라는 무서운 요구이다.
그 다음은, 기억하지 못하겠으면 기록하라는 제안이다. 그렇게 하면 똑같은 일로 두 번 세 번 물어볼 필요가 전혀 없지 않느냐는 뻔한 진리론 이다. "너는 왜? 이러면 되는데 그렇게 하느냐?"라는 또 다른 나를 내 앞에서 보기를 갈망한다.
나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 말씀을 잘 듣는 아이였다. 엄마가 "저 애는 도무지 말썽을 안 부려서 애 기른 것 같지도 않았어" 라고 하셨듯이 정말 착한 아이였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에서도 역시 우등생 교인이고 하나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신자다. 무조건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주관이 뚜렷해서 그 주관을 규율에 섞어 인도되는 옳은 길로 반항 않고 따라가는 타입이다.
내가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는 그런 사람을 원한다.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 사람이 모두 나처럼 그래주기를 바라니까 사람과의 관계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적당히 좋아하고 적당히 대화하고 적당히 만나는 그런 일은 없다. 이런 요소들이 결국 에밀리로 하여금 "성질 좀 고쳐요'"라는 탄식을 내 뿜게 했나보다. 그 성질로는 평생 저혈압이란다.
신기하게도 이렇게 글로 풀어 쓰다보니 어느새 나의 고쳐야 할 성격을 내가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 동안 나로 하여금 나 같지 않다는 이유로 내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마음 상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뭐라 사과의 말을 해야 할까?' 라는 문제보다는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라는 걱정이 앞선다.
아까 들려온 "솨아..."하는 파도 밀려나가는 소리는 바람이 낙엽을 모으는 소리였다. 아니, 어쩌면 내 몸에서 빠져나가는 나의 못된 아집의 마지막 발악하는 소리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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