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싸는 마음

2004.08.06 07:26

노기제 조회 수:659 추천:114

031804                짐을 싸는 마음
                                                                
        반가운 사람이 내가 사는 엘에이에 들렀다. 외출에서 돌아오니 전화기가 신호를 준다. 빨간불이 깜박이며 빨리 소식을 들어보란다. 나를 위해 메시지를 보관해준 전화기에 고마움을 전하며 들었다. “여보세요” 그리곤 끊겼다. 어? 흔하지 않은 음성이다. 한 번도 미국에 있는 내게 전화를 걸지 않은 음성인듯하다. 다시 들었다. 그런것 같다. 무슨일일까. 또 다시 들었다. 다섯 번 반복해서 들어봐도 그 사람 음성이 확실하다. 도무지 어찌된 일인가. 전화를 했음 말을 하던지. 그냥 여보세요로 끝내다니 정말 대책 안 서는 사람이네. 한국에서 건거야 뭐야. 전화기를 흘겨봤다. 좀 똑바로 메시지를 받아 놓지 이게 뭐니?
        서둘러 한국에 전화를 했다. 지금 출장중이신데요. 여비서의 단정한 대답에 난 그만 흐트러졌다. 역시 그랬구나. 여기 엘에이에요. XXX님 이세요? 발음도 또박또박 내 어릴적 이름이 불려진다. 맞아요. 볼멘소리가 되어 불평을 풀었다. 아니, 오면 온다고 연락이라도 하고 와야지. 싫컷 있다가 가는날 전화를 했단 말에요? 그것도 여보세요로 끊겼으니 어쩌라는 건지
        비서가 무슨 잘못인가. 그래도 차분하게 상사를 변명부터 해준다. 직원들과 함께 가셨고 업무일정이 꽉 차서 그러셨을꺼라며 셀폰 번호를 준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그 번호다. 여기서 걸려면 국제전화로 걸어야 하는 번호에 난 그만 짜증이 났다. 그냥 만나지 말아버릴까. 그냥 가 버리라고 냅둘까.
        그래봤자 내게 좋을게 없다. 보고 싶은 사람이다.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이다. 이제 보고 나면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알수 없는 사람이다. 그냥 보내 놓고 두고두고 후회 할 일을 왜 하겠는가. 국제전화 한 통화 하면 될걸 뭐 그리 신경을 곤두세우나. 미리 연락 안 한 사람은 안 하고 싶어서 그랬겠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그랬다고 비서가 이미 말하지 않았나. 더구나 멀다면 먼 한국땅에 둥지가 있는 사람 아닌가.
        전 후 사정 따지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었인가에 초점을 맞추자. 지금 내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가능한 것을 내것으로 취하면 된다. 밥 한끼 함께 먹을 수도 없다. 나와 연락이 안 되었으니 마지막 저녁까지도 일정을 짜 놓은 모양이다. 다행이 끄트머리 시간이라도 저녁식사 이후 취침 전까지가 나에게 할당되었다. 행운이라 생각했다. 다시는 내게 주어질 수 없는 시간일 수도 있다. 차 한 잔 할 시간 뿐이지만 아주 귀한 시간으로 채색 할 수도 있다.
        마땅히 찻집을 찾지도 못하고 길을 간다. 나의 일상이 점철된 길을 그에게 보여준다. 엘에이 다운타운의 야경이라면 낮 시간에 살아온 나에게도 생소한 곳이다. 이민 초기때 직장생활을 하던 지역이니 빚바랜 시절을 들추어 보여주는 셈이다. 동서남북을 오락가락 뱅뱅 돌다보니 한 시간이 흘렀다.
        어디를 또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여정의 한 순간에 슬쩍 스쳐간 사람들로서 지난 시간을 함께 추억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더불어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우리 곁을 떠난 사람들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우리도 헤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진일형도 그렇게 떠났고 대은씨도 그렇게 갔다. 우리 둘을 스치게 해 준 사람이 떠나고 없는 지금, 우리 둘 중 누가 먼저 떠난다 해도 우린 서로 알지 못한 채 남은 사람은 그 모양대로 살아갈 것이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마지막 밤, 짐을 싸야하는 마음이 착찹하단 그의 말을 씹어본다. 기약 하지 못하는 다시 만남. 어떠한 소식도 대신 전해 줄 전령이 없는 우리사이. 그리고 각각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다는 이질감등이 작은 뭉텅이 되어 소롯이 남아 떨어지는 그리움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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