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좀 살려줘요

2004.08.09 05:33

노기제 조회 수:688 추천:114

060804                나 좀 살려줘요
                                                                노  기제

         여름은 뜨겁다. 어디로 물놀이를 갈까. 더위를 피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여름다운 여름을 만끽하고 싶다. 그래서 내 온 몸이 자유롭게 물을 즐기기를 원한다. 언제나 내 몸은 물을 원한다. 입을 통해 내장으로 흐르는 물이 아닌, 온 몸의 표면을 통해 물을 접촉하고 싶어 한다. 그리곤 활력을 얻는다.
         일상생활에 지치고 기운 떨어진 어느 시점에 여행을 떠난다. 따뜻한 물이 있는 바다로 가는거다. 물 위를 미끄러지며 물살을 가르는 수상스키도 좋고, 가끔은 힘이 센 바람에 돛을 패대기 칠 수도 있는 윈드써핑도 좋다.
         진짜 물 만난 물고기가 되어 하루하루 뜨거운 햇빛과 따뜻한 바다물에서 카약킹이다 수상스키다 윈드써핑에 나를 호강시키며 열흘이 지났다. 그런데 갑자기 휴양지 전체가 술렁대기 시작이다. 허리케인이 온다는 기상대의 소식이다. 이 지역을 살짝 지나갈테니 큰 걱정은 없다느니, 아예 이쪽을 향해 몰려 온다느니 끼리끼리 모여앉아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래도 난 기회만 되면 바다로 나가 가능한 한도내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면서 이틀이 또 지났다. 내일 모레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쯤되면 허리케인으로 인해 물놀이를 더 이상 못하게 된다해도 그다지 억울할 건 없다. 그렇게 마음을 접고 차분히 허리케인 소식을 기다리던 날 저녁이다. 바닷가에 산재해 있던 보트나 수상스키들, 윈드써핑 장비들을 몽땅 어디론가 치우는 것이 아닌가. 진짜 폭풍우가 몰려 온단다. 심할 땐 호텔이 싹 쓸려 나가기도 했던 무서운 허리케인도 있었단다. 그렇게 되면 식사도 못 하게 되고 비행기가 뜰 수 없어 집에도 갈 수가 없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하늘에 맡기고 잠잠히 기다리는 일 뿐이다. 만일 허리케인이 살짝 지나기만 한다면 내일 아침에 기상나팔을 불어 식당에 모이도록 하고 아니면 우리 모두가 수재민이 되어 아수라장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우린 아무 일도 못하고 잠잠할 수 밖에 없다.
        새삼 인간의 미약함을 절감한다. 이참에 여기 모인 모든 무리들이 절대자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식하기를 소망해 본다. 절망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죽으면 죽으리란 각오도 생겼다. 사람의 일이란 모르는 일이니까. 더구나 하늘이 하시는 일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나. 그렇지만 나 좀 살려주세요. 나 집에 돌아가야 하거든요.
        밤새 호텔 전체를 집어 삼킬 듯한 바람 소리에 잠 못 들고, 두렵고 떨리는 맘 뿐이었다. 집에 두고 온 식구들에게 다시는 혼자 여행 다니지 않겠다고 입에 발린 헛 약속만 하다 말다 새벽이 왔다. 뚜 뚜뚜뚜 뚜우…..반가운 기상 나팔 소리에 방문을 열어보니 기세 꺽인 비바람 속에 나팔수가 보인다.
우선은 살았구나.
        아침 비행기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던 일부 무리들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비행기가 뜰 수가 없단다. 난 내일 가는데 내일이면 괜찮겠지. 그 와중에도 식사가 진행되고 각자가 휴양지에 온 모양새로 호텔 안에서 시간들을 보내는 모습이다. 그러나 난 달랐다. 눈 뜨면 밥 먹고 하루종일 물 놀이로 시간을 보내던 몸이 물 놀이를 할 수 없음에 기운이 쏙 빠지고 축 처진 심신이 마치 폭풍에 모든걸 다 날린 수재민 꼴이다.
        그래도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갖고 바닷가로 나가보니 영낙없이 폭풍이 쓸고간 빈 바닷가이다. 아직도 높은 파도가 날 위협하고 있다. 모래사장을 따라 호텔 주위를 조심스레 걸어본다. 한 입에 날 삼킬 것 같은 파도를 피해 걷는다. 신발 벗은 발바닥에 느껴져 오는 모래의 거친 숨소리가 불안하다.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바닷가에 오직 나 혼자만이 파도의 분노를 달래보려 시도 한다. 바람에 날려 왔나 큰 물통하나 나를 반긴다. 퍼득대는 소리에 안을 들여다 보니 물고기가 가득이다. 내 팔뚝만한 놈들이 여럿 축 쳐저 있다. 그중 유독 한 놈이 눈을 크게 치켜 뜨고 퍼득인다. 나 좀 살려줘요. 나 집에 돌아가야 해요. 꺼내서 바다로 보내 주고 싶다. 저 만치 큰 파도를 가로 막고 섰는 청년이 보인다. 어망을 들고 무서운 파도와 싸우면서 식구들의 끼니를 마련하는 가난한 멕시코 원주민 청년의 모습에 난 그러지 못하고 만다. 물고기야 어쩜 좋으니. 난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살려 달라는 아우성이 거센 바람소리와 엉켜서 나를 따라온다.


2004년 퓨전수필 7월호에 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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