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물과 같거든

2004.11.21 02:23

노기제 조회 수:986 추천:115

111704                        여자는 물과 같거든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진학 할 학교를 결정하는 데 작용했던  요소들이 있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최고라는 중학교를 가려했다. 그런데 동네에 떠도는 소문이 서울에서 최고로 좋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있단다. 학교 이름을 들어보니 처음 듣는 학교다. 50년대 말 최고의 학교는 역시 경기, 이화였는데, 서울사대부중이라니.
        어린 맘에 왠 오기가 있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학교에 지원을 한 것이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서 최고로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그 학생에게 뒤지고 싶지 않은 오직 한 마음 뿐이었다. 결국 우리학교(청계국민학교)에선 나 혼자만 지원을 했다.
        충무로 3가 쪽에 살던 내가 청량리 가까이 성동역에 있는, 그야말로 촌 동네에 있는 학교에 응시했던 것을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난 그만큼 최고를 좋아 했었나 보다. 그 당시 반 특차였던 부중에 원서를 내고 동시에 경기여중에도 원서를 냈다. 문안에 있던 경기여중은 운동장도 좁고 정서를 키울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소집일에 가서 수험표만 받고 간단히 선만 보는 것으로 인연을 접었다.
        서울대학교 사법대학 부속중학교 답게 사대와 함께 공유했던 운동장이며, 뒷동산이며 넓고 탁 트인 공간이 내겐 천국처럼 느껴졌다. 다행히 좋은 성적으로 입학을 하고 부족함 없이 사랑 받으며 3년을 지냈다. 고교 입시를 앞 둔 어느날, 입시 준비를 핑계로 외삼촌 댁에서 외사촌 동생과 합숙을 했다. 나이는 한 살 아래지만 학년이 같아서 언니소리 못 듣고 자란 사이다. 지금은 여성부 장관으로 국가 중책을 맡고 있는 천생 여자인 동생이다.
        그 애가 다니던 이화여중고는 환경이 아름답기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새파란 잔디며, 장미꽃들은 어찌 그리 많은지. 어디에서도 못 보뎐 등나무 그늘 터널은 꿈 많은 소녀들에겐 사색의 품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고교 진학을 앞 둔 내게 외숙모님이 하신 말씀은 바로 내게 학교를 선택하는 이유와 방법을 가르쳐 준 셈이다.
        여자는 물과 같거든. 물은 어떤 그릇을 만나느냐에 따라 모양이 바뀌니까, 그 그릇 만나기 전에 마음껏 넓고 자유스런 환경에서 네 자신의 모양을 만들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즉 이화여고는 우선 환경이 아름다우니 그 속에서 나 자신이 아름답게 꼴 지워질 수가 있다. 그리고 교장선생님의 교육방침이 자유함에 중점을 두어, 아이들마다 자기가 가진 특성을 살려 아름답고 자유롭게 성장하도록 최선의 뒷받침을 해 준다는 말씀이었다.
        수긍이 갔다. 그래서 옮겼다. 들은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빨강 양말을 신고 다녔다. 내가 좋아하던 색갈이었으니까. 아무도 아뭇소리 안 했다. 좀 놀라는 눈치는 받았지만. 얼마 후 제풀에 꺽여 흰 양말로 바꾸긴 했지만, 외숙모님이 하신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해 본 셈이다.
        여고 졸업 후에는 다시 부모님 그늘에서 부모님 틀대로 꼴지워 지다가 남편 만나 결혼해선 역시 남편 틀에 꼴지워 지는 나를 보았다. 그래도 가장 왕성한 성장기를 이화의 틀에 꼴지워진 관계로 난 아름답고 자유롭게 삶을 꾸려가는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여기까지 오는 내 삶의 여정에서 난 몇 개의 그릇을 거쳤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그릇에 잘 꼴지워진 모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예쁘게 살아왔다. 살아 숨 쉬는 자체가 힘들다고 생각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머리속에 떠 올리던 파란 잔디, 예쁜 장미정원들, 보라색 꽃송이들이 탐스럽게 늘어진 등나무 터널은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하는 비타민 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릇에 모양을 바꿔야 하는 물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한창 예민한 물이었을 때 그릇을 선택하는 결정을 믿고 지켜 보아 준 사대부중 선생님들의 응원도 기억해야 한다. 나 말고도 성심여고를 택해 옮긴 강 원자가 있다. 아이들 인생에 우리가 걸림돌이 될 수는 없다라는 이론으로 두 아이 모두 자유롭게 날도록 보내주신 사랑이다. 40년이 지난 후 중학교 은사이신 강 신호 선생님께 직접 여쭙고 들은 대답이다.
        지금 내가 부모되고, 선생님 되어 내 아이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새삼 생각해 본다. 아직도 여자는 물 같은 존재일까? 여성의 위상이 옛날 같지 않아 우리 부모님들처럼 염려할 필요는 없을지라도 역시 인간은 환경에 따라 변화하면서 살게 되어 있으니 어쩜 똑 같은 맥락의 교훈을 주어도 될 것 같다.
        자신이 선택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에 아름답고 예쁜 그릇을 택하라는 아주 평범한 이론을 가르쳐야겠다. 이론은 간단하지만, 과연 어떤 그릇이 아름답고 예쁜지를 모를 경우가 있겠다. 먼저 살고, 많이 겪고, 경험으로 깨달은 진리를 알려주는데 게으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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