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진 남편

2003.02.16 03:35

노기제 조회 수:577 추천:81

081602 미워진 남편

노 기제
위기는 온다. 누구에게든 온다. 내 마음에도 그 위기가 왔다. 아니, 내 마음이 아닌 내 가정에 위기가 온 것이다. 위기를 맞은 내 마음을 내가 다스리지 못한다면 분명 이 가정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가정이 깨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누가 이 상황을 막아 줄 것인가.
곰곰이 생각한다. 하루 이틀에 생긴 현상은 아니지만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나도 한 몫을 담당한 어른이다. 내가 하는 일에 일일이 남편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다. 청소기가 사고 싶은데 왜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가? 물론 종류도 많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니 의논해서 가장 적당한 것을 사면된다.
그런데 의논을 할 수가 없다. 의논이란 서로가 생각하는 바를 얘기하면서 합일점을 찾는 과정이다. 어느 한 쪽이 막강한 힘으로 밀어 부치면 상대편은 의견을 내 놓을 수조차 없다. 결국은 포기하게 되고 뒤로 물러앉으면 집안은 조용하게 유지된다.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입에 지퍼 채우고 살았다. 그렇게 굳어진 내 마음을 급기야 나 자신이 용납하지 못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 살기는 싫다. 가뜩이나 짧은 인생을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지는 못할망정 입 다물고, 표정 지우고 너는 너, 나는 나, 의논 없이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숨죽이고 산다.
이혼을 생각한다. 다른 방법이 없을까. 그리고 보니 남편은 처음부터 저런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잘 견뎌 온 것이다. 십 년 전 남편이 내 뱉은 불평이다.
"20년 조용히 잘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싫다면 나보고 어쩌란 말야."
이제나저제나 나이 들면 변하겠지 기다리며 살아 온 그것이 문제였다. 애당초 단칼에 획 돌아섰어야 하는 건데. 때늦게 돌아서자니 부작용이 심한 것이다. 그러면서 10년을 망설이며 살고 있다. 나이들 수록 더 참기 힘들고 하루하루가 고역이다. 정말 이렇게 살 이유가 없다. 갈라서자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고 차라리 내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최상의 방법인양 착각도 해봤다.
그렇게 속수무책인 채 살던 어느 날, 신문에 난 광고에서 반짝이는 빛을 보았다. 최면 사 시험 준비 반 수강생 모집 광고다. 최면을 필요로 하는 병의 종류가 나열 되어있다.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 데 내 시선을 잡는 것이 있다. 바로 '대인관계개선' 이란 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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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망설였다. 하나님 뜻에 맞지 않는 학문은 아닐까. 광고문에 의하면 분명 '최면은 마술이 아닌 과학입니다' 라는 문구가 있다. 과학이고, 의학이고, 심리학이라고 주장할 정도라면 한 번 가까이 해볼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내 마음을 콘트롤 할 수 있다면 배워보자. 그리해서 내 가정이 행복해 진다면 공부하고 싶다.
물론 남편에겐 의논도 못 한다. 뻔하니까. 소리나 냅다 지르면서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논리로 나를 욱박지를 것이다. 자기가 아는 어떤 면에 대한 지식을 절대적이라 간주하고 나를 그 테두리 안에 쑤셔 넣으려는 우격다짐. 나를 언제나 질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입을 다문다. 언제나 다물고 산다. 더구나 수강료 타낼 생각은 꿈도 못 꾼다.
망설임이 계속되면서 시간은 자꾸 갔다. 그래도 별 뾰족한 수는 안 생겼다. 내 마음은 여전히 남편을 피하고 날마다의 일상이 그렇게 지겨울 수가 없다. 얼굴 맞대기도 싫고 물론 살 대기도 싫다. 지옥이 따로 없다. 그런데 남편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허기사 자기 맘대로 소리지르고 자기 맘대로 나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데 나처럼 죽을 맛이 될 리가 있겠나.
그러니까 내가 최면을 공부해서라도 아주 행복하게 살고 싶다. 만날 때 부터 저랬던 남편을 이제 와서 싫다고 하는 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를 바꾸자. 처음에 남편을 좋아하던 그 마음을 되살리면 된다. 연애하던 시절 그 마음을 찾아보자. 나의 어느 구석엔가 분명 숨겨진 그 뜨겁던 마음을. 신혼 때의 마음도 상관없다. 최소한 내가 남편을 피하고 싶은 마음만이라도 삭제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시작된 나의 최면 학 공부는 나를 천상으로 데려갔다. 더 이상 내게 미워진 남편은 없다. 날마다 잠에서 깨는 첫 순간에 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저장된 남편 사랑하던 마음을 꺼내서 하루를 사용한다.
이제는 일터로 간 남편 돌아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루를 산다. 분명 내 가정이 깨지는 위기는 모면한 셈이다. 그러나 날마다 잠재의식을 깨우는 작업은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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