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2003.02.16 03:36

노기제 조회 수:500 추천:81

100801 악몽
노 기제
제발 이런 꿈은 꾸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정말 지긋지긋해요. 아니 글쎄 여태 시집을 못 가고 있다니 말이나 됩니까. 내 나이가 몇인데요? 밤에 자면서 진땀까지 흘려가며 한 바탕 마음고생을 하고 나서 옆자리를 더듬어 봅니다. 아아 안심이에요. 있잖아요. 나하고 나란히 누워 자고 있는 남자가 바로 내가 시집을 간 남편이거든요.
그렇게 늦지도 않았는데 엄마랑 아빠랑은 나 시집 못 보낼까봐 걱정이 태산이셨어요. 위로 오빠 둘에다 바로 나인데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무척 답답한 일이에요.
어릴 때부터 인물이 오빠들 보다 떨어진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나는 내가 이쁘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거든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요? 내가 뭐 인물 팔아먹으며 살 것도 아니고 사실 말이지 내가 내 어릴 적 사진을 보면 그렇게 미운 얼굴도 아니더라구요. 그렇다고 이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귀엽던데요.
한국나이 스물 다섯이 넘으면서 아빠의 맞선자리 주선은 줄을 이었습니다. 다들 번듯하게 직장이 있고 집안은 꼭 제목을 붙일 만큼 괜찮은데다 학벌도 이름 있는 대학 출신들이래요. 나는 그 때 대학입시에 두 번씩이나 낙방을 해서 최종학력 고졸이 고작인데다 직장도 없이 집에서 밥만 죽이는 백수였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렇게 대책 없이 지내는 백수는 아니었어요.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서 우선 일본어부터 시작해서 언어를 재산으로 삼기로 했거든요. 그랬더니 엄마 아빠의 비밀얘기가 일본말에서 중국말로 바뀌었어요. 그래서 중국어 공부에 들어갔는데 아깝게도 계속하지를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맘에 안 들어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답니다. 왠지 자꾸 징그러운 생각이 드는 선생님이었어요. 그래서 영어 배우기로 넘어갔답니다.
이런 나의 배경을 상대편 남자들은 내가 똑똑해서 탐이 난다고 아빠한테 말했대요.
그 중에서 지금도 가끔 생각하는 첫 번째 맞선자리를 말하고 싶어요.
막무가내 악을 쓰며 싫다고 하는 내게 아빠가 강제로 약속한 장소로 나가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했죠. 아빠랑 이럴게 아니라 나름대로 대책을 세워서 대결을 하자구요. 가끔 누구나 써먹는 수단 있잖아요. 상대편 마음에 안 들기 작전 말에요.
엄마가 옆에서 미장원에 가라, 옷은 이걸 입어라, 등등 지금 드라마에서 보면 똑같은 대화가 나오는, 판에 박은 잔소리였습니다. 미장원에 가서 머리를 아주 아줌마 스타일로 올리고 옷은 중년 부인처럼 사촌언니의 털외투를 빌려 입고 나갔어요. 약속장소에 가보니 아빠가 얘기하던 아빠 친구 분이 손을 번쩍 드시는데 난 모르는 아저씨에요. 아빠친구라면 내가 모르는 아저씨가 없는데, 더구나 날 잘 알아서 중매까지 들어주시는 분이 내가 전혀 모르는 얼굴이라니 순간 화가 벌컥 나더라구요.
샐쭉해진 차가운 표정으로 의자에 슬쩍 걸터앉자마자 총알처럼 내 뱉던 말.
"아저씨가 날 얼마나 안다고 중매를 서는 거에요? 난 아저씨를 전혀 모른단 말에요. 무슨, 말이 되는 일을 하셔야지요."
그 때 곁에 있던 당사자 총각의 황당해 하던 표정을 뒤로하며 일어서 나왔지요. 물론 그 아저씨의 어이없어하던 표정도 아랑곳하지 않았구요. 그날 밤 아빠는 내게 아무 말 안 했어요. 아저씨가 다 일러 바쳤겠죠. 내 말이 뭐 틀렸나요? 그렇잖아요? 중매란 뭘 좀 알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 후론 아빠의 맞선자리 주선 방법도 많이 달라지셨구요.



그 사건을 가끔 혼자만 생각하는 이유가요. 바로 그 총각이 S대 출신 약사였고 그 당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거든요. 지금 우리남편의 대 선배였던 셈이에요.
이 년 후 난 결혼을 했어요. 중매가 아니고 내가 스스로 찾아낸 사람이에요. 내가 원하던 방법이죠. 마치 시장바닥에 늘어 놓인 채 누가 골라가 주기를 기다리는 느낌이 드는 중매는 그래서 한사코 싫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왜 가끔 난 시집 못 가서 안달을 하며, 돌아가신 엄마 아빠가 옛날처럼 내 곁에서 맞선자리 약속하고, 등 떠밀어 나가게 하고, 상대방총각이 나를 마다하고, 결혼은 못 하고 나이만 먹는 꿈을 꾸는 걸까요. 꿈속에서도 나는 혼자 큰일이구나 어떻게 해야 하나를 줄 곧 중얼거린답니다. 현실이 그렇다면 정말 진땀나는 일이에요.
살며시 남편의 얼굴을 봅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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