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차로

2003.02.16 03:57

노기제 조회 수:788 추천:83

교차로

노 기제

뭘 그리 많이 살 것이 있어 코스트코까지 가느냐고 회원증을 내지 않았지만 가끔은 가보고 싶다. 그럴 때면 의례 들리는 곳이 버질과 산타모니카 길 교차로에 위치한 미스터 석이 일하는 창고다. 아무 때나 내가 편한 시간에 잠깐 들리면 언제나 미스터 석에게서 코스트코 회원증을 빌릴 수 있다. 출퇴근길에 지나는 길이니 하루 두 번 들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다.
처음 회원증을 낼 때 드는 비용이며 매년 갱신 할 때마다 드는 비용을 건질 수가 없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회원증은 안 내고, 필요하면 미스터 석에게 회원증을 빌리러 간다. 프라이스클럽이던 이름이 코스트코로 바뀌고 회원증엔 사진이 찍혀있다. 미스터 석은 남자이고 나는 여자다. 카드에 찍힌 미스터 석의 사진을 보면 머리가 길고 새우눈의 모습이 머리를 짧게 한 역시 새우눈의 나와 막상 막하, 거기서 거기라고 키득대며 빌려주곤 한다. 더구나 사진이래야 내 작은 검지 손가락 끝 부분 만한 작은 크기다. 사진과 내 모습이 다르다고 항의 할만한 직원이 코스트코엔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별로 필요한 것도 없이 18개들이 계란이 1불 6전으로 마켓보다 엄청 싸다고 생각돼서 산다. 껍질을 깐 베이비 당근 한 봉다리, 그리곤 남편 점심을 위한 빵이 마켓의 반값이다. 그 외에 구경하다 이것저것 사다보면 모두 낭비과에 속하게 된다. 살찌는데 보탬이 되는 하겐다즈 아이스 크림이 물론 마켓보다 싸니까 빼놓지 않고 산다. 절대로 필요하지 않은 물품을 자꾸 집어넣는다. 24개들이 화장지 한 묶음이 과연 마켓보다 얼마나 싼지는 계산이 잘 안 된다. 종류도 크기도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값이 싸서 이익을 보는 것보다는 필요 없는 물건을 사는 바람에 불이익이 더 크다.
미스터 석은 오래 전에 같은 교회를 섬기던 교우다. 인품이 털털해서 편안하게 가까워졌고 교회에서는 궂은일 앞장서서 불평 없이 하던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다. 성경과 믿음과 교리와 신앙생활을 일치시키고자 갈망했던 교우중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말씀과 생활이 너무나 다른 목사님의 욕망 때문에 교회가 두 동강 세 동강이 나면서 교회를 떠난 사람이다.
그런 미스터 석을 부담 없이 만나는 방편으로 나는 코스트코 회원증을 내세웠다. 오랫동안 교회를 떠나 살다가 어떤 계기로 다시 다른 교회에 출석을 하며 신앙인으로 돌아온 것이다. 가끔 만나면 식구들 안부와 새로 적을 둔 교회 얘기며 지난 날 함께 했던 교우들의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언제나 몸을 쪼개어 일에만 열중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따르지만 대학 다니는 두 아이들 학비며 생활이 그를 항상 일터로 밀어내는 줄 알았다. 최근에는 토요일 일요일 쉬는 날에도 여기저기 일거리를 따라 하루도 쉬지 않고 다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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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적을 두고 다니는 교회에 마음을 못 부치고 방황하는가 싶어 저녁이나 함께 하자해도 시간을 낼 수가 없다고 한다. 주말에도 물론 주중에도 정규적 일이 끝나면 곧장 다른 곳으로 가서 밤늦도록 일하고 집에는 겨우 잠자러 들어가는 형편이라고.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일, 일, 일만 해야하는 그 속사정을 나는 왜 묻지 않았을까.

미스터 석이 일하는 창고에서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면 쎄븐 일레븐 편의점이 있다. 편의점 주인은 케빈이다. 케빈은 내가 속해 있는 스쿠버 다이빙 협회의 총무다. 매달 한 번씩 배를 타고 멀리 바다로 나가는 때는 우리 집에서 가까운 케빈네 가게에 모여서 차 한 대로 부두까지 간다. 네 사람 정도 함께 간다. 여성 회원이 동승했으니 남성 회원들의 기분도 좀 가벼워 질 수도 있지만 케빈이 능청스러운 장난기로 언제나 초를 친다. 회원들이라도 대개 초보들이라 통성명도 못한 처지다.
"할머니, 아까 데려다 준 사람 조카에요? 아니, 남편이라구요? 와 영계네."
이쯤 되면 동승한 남성 회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내게 집중한다. 아무리 봐도 할머니는커녕 자기들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또한 스쿠버 다이빙 같은 심한 운동을 할만한 체격도 아니고 얼굴도 그저 얄상 하기만 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동승한 그들보다 오래된 선배 다이버임을 인식시켜준다.
사실 나이를 말하면 확실히 내가 한참 위이지만 그 나이라는 것이 묘해서 그냥 짐작으로 자기들 또래라고 생각하다가 진짜나이를 알려주면 단번에 케빈 처럼 할머니하고 부르려 든다. 그 나이에 어디서 그런 체력이 나오느냐고 놀라면서도 말이다.
게다가 나는 배 멀미를 심하게 해서 배에 타는 순간부터 밤새 꼼짝 않고 누워있다. 배 밑 쪽으로 칸칸이 침실이 있어서 각자 차지하지만 대부분 식당에서 카드놀이나 담소로 새벽까지 떠들석하기 때문에 잠을 잘 수도 없다. 이럴 때 케빈은 드라마마인이란 멀미약을 들고 찾아오곤 한다. 할머니, 약 먹었어? 단단히 준비하느라 약도 먹고 귀밑에 패치도 부치고 해도 항상 고생인데 케빈이 주는 드라마마인 한 알이 효과 면에선 월등하다.
그뿐인가. 멀미 때문에 장비를 내 손으로 준비하지 못하고 그냥 밤새 누워 있다가 새벽녘에 첫 다이빙 할 장소에 도착하면 다들 빠르게 물속으로 들어가기 빠쁘다. 그때서야 공기통에 연결되지 않은 장비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부탁하는 내게 자기 장비 자기가 관리 못하는 사람은 다이빙 그만 두라며 언성을 높이는 것도 케빈이다. 그때까지도 배가 이리저리 파도에 밀리면서 내게 멀미의 고통을 주지만 케빈의 높은 언성과 장난기 가득찬 얼굴을 보며 잠시나마 피식 웃을 수 있다.
나이가 더해가며 하고싶은 것 하겠다는 내 열성이 식어지면서 케빈을 보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그저 하루에 두 번 출퇴근 때 케빈네 쎄븐 일레븐 가게를 힐긋 보며 지나치는 정도다. 워낙 멀미가 심하니 일년에 한 번 정도 멕시코나 하와이로 다이빙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만족하고 매달 나가는 가까운 바다 다이빙은 졸업을 한 셈이다.

어느 날 갑자기 코스트코 회원증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보니 한 석 달쯤 미스터 석 일터에 들르지 않았나 보다. 예의 그 창고 앞에 차를 세우려하니 자리가 다 비어있다. 창고 문은 활짝 열려있다. 열린 문으로 보이는 것은 넓은 공간뿐이다. 낯선 사람 두어 명만 눈에 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무슨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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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된 사연인 즉 미스터 석이, 자기가 일하던 회사에다 돈을 투자했단다. 투자래야 남아 돌아가는 돈을 찔러 넣은 것이 아니고 집 저당 잡히고, 신용카드에서 빌리고, 그런 돈이니 다달이 이자만도 엄청난 금액이라 그렇게 날이면 날마다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이자라도 벌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렇다고 제대로 형식 갖추어서 계약서 작성하고 서명하면서 돈을 투자한 것도 아니다. 회사측에서 나 몰라라 하면 그만 그대로 본전도 못 건질 판국이다. 그렇다고 무슨 표시 나게 잘 되어 가는 것도 아니다. 주인은 이미 파산 신청을 하고 자기 앞가림은 해 논 모양이란다.
형제들이나 안사람에게나 어느 누구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혼자 저지른 일이라 혼자서 해결하려고 얼마나 버텼을까. 결국은 급성 간암 환자가 되어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이미 미스터 석의 모습은 아니었다. 빨랑 일어나야지 나 그 동안 코스트코 못 가고 있잖아. 웃자고 하는 소리로는 이미 힘이 빠진 말이다. 그 동안 너무 무리했으니 좀 쉬라고 하나님이 그러시나 봐. 이 소리 역시 허공에 여운만 남기는 소용없는 말이다.
투병기간 단 두 달. 미운 사람 가슴에 두지 않고 맑고 잔잔한 미소로 두 아이들이 드리는 찬송과 기도를 들으며 조용히 미스터 석은 갔다. 며칠 모자란 쉰 셋 짧은 여정을 미스터 석은 그렇게 접었다.

내 사무실 근처에 케빈이 가게를 열었다. 스쿠버 다이빙 장비 일체를 취급하며 학생들 교육도 시키는 작은 가게다. 쎄븐 일레븐 편의점은 사람을 두고 주인인 케빈은 하루에 한 번씩 둘러보기만 하는 모양이다.
이쯤 되면 사람 사는 것처럼 산다고 보여진다. 24시간 영업하는 편의점이지만, 동네가 좋아서 우선 안전하고, 믿을 만한 사람한테 가게 맡길 수 있고, 자신은 취미생활 연장해서 다른 가게에서 하루 다섯 시간만 일하며 산다. 아주 매력 있는 삶이다.
일반적으로 스쿠버다이빙 전문용품 가게라면 우리들 생각엔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국사람 다이빙 인구래야 손바닥에 다 보인다. 새로 다이빙 인구를 늘려가지만 장사라고 하기엔 수지 타산이 잘 안 맞을 것 같다. 그러니 편의점을 따로 운영하니까 우선 보기에도 안심이다.
어쩌다 한 번 들러보면 아, 할머니, 하는 익살은 여전하다. 집에서 잠자는 내 장비들 팔고 싶다고 했더니 가지고 나오란다. 팔기는 뭘 파느냐고 후배들 위해서 기증하란다. 다이빙 정도 하는 사람들이면 다들 넉넉한 사람들이라 쓰던 장비 기증 받을 사람 있겠느냐 대꾸하곤 우선 갖다 주었다.

"스쿠버 다이빙 하는 사람인데 이 종길 이래. 자기 알어? 죽었대."
저녁상을 물리며 신문을 보던 남편의 말이다. 다이빙 안나간지 오래 돼서 새 사람들은 내가 모르지. 다이빙하다 죽었나. 우선은 이름이 생소하니까 별 신경 안 쓰고 며칠이 흘렀다. 유난히 바쁠 때면 신문도 그날그날 못 읽고 모았다가 한꺼번에 보곤 하는데 그날도 내가 신문을 본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읽고 얘기했던 거다.
시간 여유가 생긴 주말 아침, 묵은 신문들을 읽고 있었다. 바로 그 부고다. 이 종길, 괄호 안에 케빈 이라고 쓰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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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로 케빈은 아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일뿐더러 경험도 풍부해서 규칙을 어기며 다이빙을 했을 리도 없다. 스쿠버다이빙은 규칙만 잘 지키면 아주 안전한 운동이다. 급해진 마음이 전화를 한다. 주말 아침이라 어쩌면 좀 이른 시각이지만 실례를 하자. 역시 잠에서 덜 깬 목소리가 들린다. 나와 함께 교육을 받고 지금까지 계속하는 맹렬파다.
"영애씨, 나 노기제. 며칠전 신문을 이제 보는데, 이 케빈이 우리 케빈야?"
"맞아. 케빈야."
"어떻게 된거야? 사고야? 가게 들러서 케빈 만난 지 두 달밖에 안됐는데."
너무 갑작스런 상황에 모두가 충격이 컸다. 얼굴 색이 안 좋아서 병원에 한번 가본 것이 두 달 전이란다. 근데 그 때 간암 진단을 받았단다. 바로 두 달 전이란다.
쎄븐 일레븐 팔고 그 돈으로 다른 사업하려다 나쁜 사람한테 홀라당 날렸단다. 그래서 집도 팔고 아파트로 나가 마음고생이 심했었단다.
마흔 고개도 못 넘은 서른 아홉 한창 나이다. 아직 어린 두 딸아이와 예쁜 아내를 두고 어떻게 떠났을까.

여전히 내가 아침저녁으로 지나는 길, 버질과 산타모니카 교차로는 나를 피식 웃게 만든다. 남잔지 여잔지 구분도 안 되는 새우 눈의 내 모습을 일깨워 주는 미스터 석의 음성이 들린다. 뒤이어 길 건너 쎄븐 일레븐 가게의 훤한 불빛에서 할머니하며 케빈의 음성이 장난기 어린 표정에 실려 내게 달려온다.
아직도 그 두 사람은 여기 이 교차로에서 번갈아 나를 놀린다.
오늘도 이 길을 지나며 난 소리 없는 미소로 그들을 만난다. 내 얼굴엔 웃음이 번지는데 왜 내 가슴은 이리도 아려오는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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