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스키 준비장

2003.02.16 04:00

노기제 조회 수:649 추천:80

093001 수상스키 준비 장

노 기제
"베이커씨, 물 한 컵만 갖다 주실래요?"
마치 직장에서 아래 사람에게 부탁하듯 정중한 말솜씨가 이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다. 물을 건네는 손이 유난히 작고 하얗다. 분명 남자일텐데 얼른 남자라고 판단하기를 망설이게 하는 자그마한 체구며 말갛게 미소를 피운 얼굴이 온화하다. 저절로 내 얼굴에도 그 온화한 미소가 전염되어 피어난다. 물 컵을 받아드는 손을 좇아 얼굴을 보니 약간은 남성스런 인상의 여자다. 이를테면 남자와 여자의 인상이 조금은 바뀐 듯한 느낌을 접하면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상스키를 타려면 모래사장에서 150미터 가량 바다 쪽으로 떠 있는 준비 장까지 헤엄쳐 나가야 하므로 흔히 들고 다니던 물병이나 햇볕 차단제 등은 소유할 수가 없다. 대신 관계자들이 준비한 커다란 물통에서 얇은 종이컵으로 목을 축여야 할 형편이다. 그것도 한 바퀴 타고 들어와서 자신이 직접 따라서 물을 먹곤 한다. 스키를 신고 바다에 다리를 내리고 준비 장에 걸터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는 중에 물 한 컵을 요청하는 모습이 흔한 모습은 아니다. 모두가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바쁜 사람들이다.
더군다나 막걸리 한잔 걸친 듯한 컬컬한 여자의 음성이 맑고 깨끗한 남성의 음성과 많이 비교가 된다. "여기 있어요. 내 사랑" "고마와요. 베이커씨" 깍듯이 부치는 씨 자 때문에 부부의 대화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키도 체격도 여자가 약간 크다. 남자의 인상은 마치 자상한 의사아저씨 쯤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 다 오십대 중반정도로 보인다. 우리와 같은 동양인이 아니라서 짐작이 빗나갈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큰 차이 없이 나이를 어림하곤 한다.
여자가 한 바퀴 돌고 들어오고 몇 명 뒤에 내 차례다. 그 남자는 어느새 탔는지 알 수가 없다. 얼마 후, 또 그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주 잘 했어요. 정말 멋지게 했다구요. 당신 근사해요" 라며 입에 침이 마른다. 난 속으로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주면서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저이가 글쎄 한 발로 스키를 타고 돌아왔어요" 라며 진짜 호들갑을 떤다. 두 발로는 얼마나 탔느냐고 물었더니 "평생" 이라고 말한다.
휴가로 오늘 도착해서 첫 번째 타는 스키를 한 발 스키로 시도했는데 해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선 나도 축하를 해주고싶다. 수상스키 삼 년 차인 내가 이를 악물고 한 발 스키를 타려고 벼르는 참이니까. 평생을 두 발 스키를 탔다는 저 미국남자가 오늘에야 한 발 스키를 해 냈다면 난 아직 느긋하게 시도해도 여유가 있다. 그래도 이 참에 한 번 시도해보자.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스키 하나만을 신고 물에 뛰어 들었다. 보트를 운전하는 선생에게 말했다. 한 발 스키라고. 아니 그런데 이 선생, 물에 던져진 로프를 거둬들이며 대롱으로 시도하란다. 허기사 그게 순서지. 저 남자는 그냥 로프로 했다면서 왜 나는?
불평하기보다는 실력으로 보여주자고 선생이 시키는 대로 대롱에 매달려 한 발 스키를 시도했다. 생각보다 수월하게 잘 했다. 바다 한 가운데까지 가서는 로프를 던져주며 일어서란다. 시키는 대로했다. 그런데, 일어설 수가 없다. 네 번씩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 기운은 다 빠지고 다시 대롱에 매달려 돌아오던 중, 대롱을 놓쳤다. 팔이 끊어지는 듯 아프다. 대롱을 놓치고 물에 빠질 때 뒤통수를 호되게 맞았는데 물의 힘이 그렇게 쎈 줄 미처 몰랐다. 손아귀 힘도 없어서 더 이상 대롱을 잡을 수도 없다. 급기야는 스키를 벗고 보트에 올라타고 돌아왔다. 준비장에 있던 그 여자, "잘 했어. 난 엄두도 못 내겠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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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도 빠지고 팔이 너무 아파서 다음 내 차례에는 다시 두 발 스키로 바꿨다. 너무 조급하게 한 발 스키를 타려들지 않는다면 난 수상스키가 너무 좋다. 물위를 미끄럼 타며 저 깊은 바다 속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무섭게 넘실대는 파도를 두 발로 가로질러 가며 맞부딪는 통쾌함도 다른 운동에선 맛 볼 수 없다.
처음 시작은 숨을 고르는 작업부터 해야한다. 물 속에서 앉은 자세로 균형을 잡으려면 마음이 평안해서 호흡이 안정상태가 돼야 가능하다. 두 무릎을 가슴에 부치고 다리는 약간 벌려서 몸이 이리저리 비틀거리지 않도록 한다. 두 팔은 죽 뻗은 상태를 유지하며 두 무릎사이로 로프의 삼각형 부분을 잡는다. 보트가 움직이면서 줄이 팽팽해지며 두 발에 물 저항이 느껴지면 줄이 끄는 대로 자연스레 몸을 일으킨다.
맑은 정신으로 집중을 필요로 하는 수상스키를 즐기며 새삼 삶의 태도를 점검한다. 두 세 바퀴 돌고 모래사장으로 헤엄쳐 간 베이커씨 부부같이 나이가 들어서도 서로를 존중하는 예의바른 말씨와 아끼지 않는 칭찬의 말. 용기를 주는 말.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
수상스키를 타기 위해 안전조끼를 입고, 발에 맞는 스키를 고르고, 지시사항을 듣고, 차례를 기다리며, 앞서 타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잊지 않는 이 준비장 이야말로 바로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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