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진 소를 보며

2003.02.24 02:32

노기제 조회 수:643 추천:78

무리진 소를 보며
노 기제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촉촉하다. 지나가는 비 였을까? 하늘이 어둡게 자리를 편걸 보면 소나기는 아닌 듯 싶다. 몇 시인가 따지지 말자. 밤을 향한 전초라고 믿어진다. 푸른 초장에 누워있는 소 떼의 모습에서 넉넉함이 보인다. 소도 기댈 언덕이 있어야 않겠느냐던 개척자 시절의 한탄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 평안한 소들의 모습에서 왜 하필이면 외로웠던 상황들이 기억나는 걸까?
초등학교 오 학년 여름이었다. 밀린 월사금을 갖고 오라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에 번번히 대답은 "아버지가 오시면......" 이었다. 언제 오신다는 대답도 확실히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일본에 출장 가셨다는 사실뿐이었으니까. 경제능력이 전혀 없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엄마. 게다가 나처럼 돈을 타가야 하는 오빠가 둘 있으니 돈 달라고 할 곳이 없었다.
보통 가정처럼 아빠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엄마가 살림을 한다면 당연히 엄마를 졸라댔겠지만, 우리 아빤 생활비나 교육비나 엄마에게 넉넉히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쌀도 떨어지고 우리들 학비도 제때 주지 못했다. 급하면 엄마가 이모 댁이나 외삼촌댁으로 가신다. 쌀도 얻어오고 돈도 얻어온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누구한테 학비를 달라고 하겠는가. 아버지가 오시기만 기다렸다.
아버지가 일본엔 왜 갔으며 언제 오느냐고 다그치는 담임 선생님께 대답을 못했더니 교실 밖에다 벌을 세웠다. 두 시간 이상을 밖에 서있으니 옆 반 선생님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시며 들어가서 잘못했다고 그러라신다. 잘못한 게 없는 나는 할말이 없었다. 그냥 서 있을밖에. 그 순간 옆 반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써 주심에 눈물이 났다. 슬픔은 아니었다. 결국 옆 반 선생님이 담임 선생님을 찿아 우리 반에 들어가시고 얼마 후 나는 벌서는 일에서 풀려났었다.
어릴 적 겪은 물질적 어려움을 생각하며 요즘의 나는 주위에 누군가 돈 때문에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내가 감당할 수 있으면 선 듯 제의를 한다. 내게 특별히 부탁하지 않아도 돈을 손에 쥐어준다. 형편 되면 갚으라고. 이왕 도와 줄 마음이면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여유 있는 친구에게 없는 사정 털어놓을 땐 이 눈치 저 눈치 자칫 비굴하게 느끼기 마련이다. 이왕이면 그런 마음도 들지 않도록 먼저 배려를 해주고 싶다.
내가 돈 때문에 느꼈던 굴욕감, 절망감을 다시는 이 세상에 존재시키고 싶지 않다. 자식의 학비 마련 때문에 친정 오빠, 친정 언니 찾아가 고개 숙였을 엄마 생각하면 난 정말 부자가 되고 싶다. 내게 찾아와 고개 숙이는 사람들에게 이유 묻지 않고 주고 싶기 때문에.
고등학교 졸업하기까지 제때 납부하지 못했던 학비 때문에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한 두 달씩 학교를 못 갔던 아픈 기억도 있다. 새 학년 학비를 납부해야만 진급되는 반을 알려주는 제도를 택한 학교 행정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것은 그런 형편 때문에 슬퍼하거나 기가 죽거나 하지 않았던 내 마음가짐이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어깨 피고 학교생활을 했었다.




돈이 없어 학비 제때 못내는 것이 결코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렇지만 내가 성인이 된 후엔 내 생활은 내가 책임 져야 한다는 것도 난 깨달았다. 내가 부모 되어선 자식에게 부모 된 책임은 꼭 하리라 다짐도 했다.
허지만 인생 살아보니 그게 어디 내가 마음먹는 대로되었던가? 잘 먹고 잘살고 싶은 마음이야 다 똑 같은데 안될라 치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서도 안 되는 게 우리네 삶이다.
쌓아놓고 아까워 벌벌 떨고 살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힘든 사정 들으면 외면하지 말자고 다짐도 한다. 문득 서러운 맘에 울컥 눈물도 쏟지만 다행하게도 그건 지난 일이니까 곧 안심이 된다. 그런 아픈 과거 때문에 지금 힘든 사람들 도와주고 싶은 마음 있으니 감사할 뿐이다.
엄마도 이모도 돌아가시고 외삼촌 한 분 생존해 계신다. 옛날 걸핏하면 엄마 편에 쥐어 주셨던 내 학비 생각하며 안부를 여쭌다. 여든 여섯 토끼띠이신 외삼촌께선 아직도 버스나 전철로 옛날 활동 무대였던 명동으로 나들이를 가신단다. 사진작가 이셨고 스케이트 심판이셨던 전직이 아직도 몸에 배어 있는 멋쟁이 시다. 챙겨드리는 용돈이 그 많은 조카녀석들 중 제일이라고 칭찬이 되어 돌아온다. 가끔은 '이왕 주실 거였으면 미리 주셔서 학교 빠지는 일없도록 해주실 일이지' 라고 불만도 품어 보지만 베푸는 입장이 되어보니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외삼촌 보다 한 수 윗길을 택했다. 이왕 도와주려면 먼저, 어렵게 고개 숙이고 요청하기 전에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하늘이 내게 허락하신 물질이 있다면 그건 하늘에 속한 것이니 내 것 이라고 우기지 말자. 내 것이 아니면 맡아 관리 하다가 주인이 어디에 쓰라고 명령하면 그대로 따르면 그뿐이다.
비가 뿌리고 구름이 해를 가려도 푸른 초장에 누운 소 떼는 근심이 없다. 일시적으로 몸이 젖고 추워진다 해도 해는 다시 비칠 것이고 먹이는 언제나 주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기댈 언덕이 당장 눈앞에 아니 보여도 기댈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소 떼를 닮고 싶다.
끌어안고 욕심 내지 말고 펼쳐놓고 나누라는 하늘의 법칙을 깨달은 내 마음이 촉촉히 젖은 날씨와 함께 넉넉하다. 달리는 버스가 속력을 줄인다.
목적지가 가까워진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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