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나의 하루

2003.02.24 02:35

노기제 조회 수:694 추천:82

백수, 나의 하루
노 기제
고양이 얼굴 닦는 모습이 유난히 귀엽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그렇게 얼굴을 닦는 모습을 보는 사람은 얼굴을 찡그리겠지? 단작스럽게 뭐 하는 거냐고. 내가 보아온 고양이 세수하는 모습은 언제나 똑 같다. 오른쪽 앞발을 열심히 핥는다. 그리곤 그 발로 얼굴을 닦아낸다. 일정한 원형을 그리며 닦아내는 행위가 정확하다. 발로 얼굴을 닦고 그 발을 핥고 하는 반복행위가 오차 없이 보여지고 또한 귀여움마저 내게 전해온다.
어려서부터 나의 세수하는 모습에는 "고양이 세수하듯"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흉인지 칭찬인지 구별할 필요도 없다. 그런 수식어에 전혀 신경을 안 썼다. 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얼굴을 닦으면 된다. 가뜩이나 추위타는 내가 구태여 목을 빼고 찬물을 들이 댈게 뭐람. 눈꼽이나 겨우 떼고 살살 물이나 바르면 나름대로 세수는 끝이다. 딱히 하는 일도 없고, 꼭 외출을 할 이유도 없는데 세수는 정성껏 해서 뭐 하랴 하는 심사가 작용했던 때의 습관이었다.
오늘 불현듯 그런 옛날의 습관이 재현되고 있음을 보았다. 딱히 갈곳도 없다. 아침 설거지 후에는 책만 서너권 들고 제일 편안한 방으로 들어가 배 깔고 엎디어 책을 읽는다. 언제나 같은 방식이다. 수험생이던 때도 그렇게 엎디어 공부를 한답시고 책을 펼치곤 했다. 소롯이 찾아오는 잠을 밀쳐낼 재간이 내겐 없다. 책장이 섞이지 않게 책을 쥔 손에는 힘이 간다. 밀려오는 잠에 빠지면서도 책 속의 내용은 머리 속에서 뱅뱅 맴을 돈다. 자는 것도 아니고 책을 보는 것도 아닌 비몽사몽간에 시간만 죽이는 비생산적인 행위이다.
뉘라서 이런 나를 탓 할까마는 내 속을 할켜 대는 비명은 "일어나 일을 해야지, 뭐 하는 짓거리야 이게." 제법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다. 하루가 몇 시간인지 상관없이 뒹굴뒹굴 잘도 퍼져 지낸다. 요즘 나의 백수생활이 새삼 진짜 백수의 간판을 높이 든 가장들의 심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모아놓은 재산 없고,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먹고살기는 해야하는데 갑작스레 일자리를 잃는 경우가 어디 IMF 시절뿐이겠는가. 아침 잘 먹고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동료들과 희희낙낙 점심시간 재미있게 보내고, 또 충직하게 일하고, 퇴근시간 오분전 상사가 요청하는 면담실에 가보니, 구구절절 회사의 어려운 사정과 함께 짤리는 경우가 언제 누구에게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는가. 자영업을 하는 경우도 하루아침에 사장님을 백수로 만드는 경우가 간혹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 순간 하늘을 향해 울부짖음은 "왜 하필 납니까?" 여지껏 푸른색 인줄만 알았던 하늘이 진짜 노오란색 임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아찔하니 어지럼 증세도 맛보아야 하는 시간. 그 후 부터는 어떤 형태이던 백수의 간판이 따라 붙는다.
백수로 있는 동안은 여행도 못한다. 가까운 바닷가에 가도 아름다운 바다를 만나지 못한다. 그저 처량하게만 들리는 파도소리가 있을 뿐이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어도 꾀재재함을 면치 못한다. 끼니를 다 찾아 먹어도 항상 허기가 지는 것 같다. 잠인들 잘 잘 수 있겠는가. 밤마다 악몽이요 꿈인지 생신지 모를 상태에서 허우적거리며 뒤척이기 일수다. 밤낮으로 일자리를 찾아 헤맨다.





날개 죽지가 꺽인 새를 보는 듯하다. 안사람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직장에 가는 척
집을 나선다. 등산로 입구에 보관소가 있으니 말끔한 신사복 벗어 맡기고 운동복 차림으로 산을 오른다. 마음이 편해야 등산도 운동이 되지. 산에 오르는 마음이 가벼울리 없다. 한 때 신문에서 읽은 한국의 실상이었다.
백수가 됨을 즐기고 있는 요즘의 내 생활에서 한 가닥 죄스러움을 느낀다. 아직 기운 펄펄하고, 일 할 수 있는 능력 있고, 일거리가 있음에도 백수를 자청한 것이 혹시라도 인간 본연의 자세를 비웃는 처사는 아닌가?
세수도 제대로 안하고 부시시한 머리하며 세월아 내월아 늘어지기만 하는 몸뚱아리
이젠 좀 추슬러야 되지 않을까 싶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에 화들짝 놀라지만 당장 나오라는 공짜점심 초대에도 고양이 세수로 일관한 지금은 외출이 불가능하다. 샤워하고 단장하려면 점심시간은 지날 터이고 배달되는 오늘 신문 읽다보면 저녁 지을 시간이다. 하루는 왜 이리 짧은지, 스물 네 시간 중 다섯 시간쯤은 누가 훔쳐간 것 같다.
일하며 공부하며 그 바쁜 짬짬이 즐겨하던 취미생활도 요즘처럼 남아 돌아가는 시간에는 손을 못 댄다. 시간이 남아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 이건 역시 억지 백수의 시간 계산 법인가? 하는 일없이 헐레벌떡 시간만 삼키는 백수. 언제까지 동정도 받지 못하는 이 백수 생활을 즐길 것인지 조금은 염려스러워 진다.
아침이면 재빨리 샤워하고 머리 단장에 총력을 기울여 보려해도 설거지 이후는
여전히 그 다음 단계로 진전이 안된다. 그렇게 빠릿빠릿 잘도 돌아가던 머리도 일체 휴무상태를 선언한 듯 느긋한 느낌이다. 샤워는 벌써 해서 무엇한담? 서둘러 할 일도 없잖아?
아침 식사 전, 고양이 세수라도 했으니 이따 운동이나 하구 하지 뭐. 그 이따라는게 과연 실행성이 있는가는 나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것을 알뿐이다.

08140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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