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정지

2003.03.23 01:07

노기제 조회 수:711 추천:82

110701 일단 정지

노 기제
한가한 골목길을 운전하고 가다가 자주 만나는 것이 있습니다. 빨간색의 우선 멈춤 표지판입니다. 바로 운전기사가 제일 싫어하는 춤이라는 농담도 있지요.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일단정지 표지판을 좋아하지 않아요. 우선 만나면 확실하게 정지를 하고 3초 정도를 머물러야 하는데 대부분의 반응은 대강 좌우를 살피고 슬그머니 미끄러지며 냅다 페달을 밟곤 한답니다. 분명히 오는 차량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순경도 보이지 않으니 적당히 서고 약삭빠르게 시간 단축하자는 의도에서 운전을 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일생을 뒤돌아 볼 때 누구에게나 이런 시기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각기 모양새가 다르고 기간의 길고 짧음이 다르다 해도 분명 정지된 상태가 있었을 겁니다. 만약 내 인생에만 이런 일단 정지 시기가 있었다면 아마도 난 하나님께 무척이나 따져 물었을 겁니다. 아니, 따질 것도 없이 하나님 자체를 부인하고 교회에 발을 들여놓지도 아니 했겠죠.
엄마의 말씀이 감기 몇 번 앓은 것 외에는 아프지도 않아서 애 기른 것 같지도 않다고 하셨어요. 두 오빠 밑에서 커서 그런지 계집애다운 면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오빠들 하는 자치기, 구슬치기, 딱지치기, 제기차기, 팽이치기 등 사내녀석들과 어울려 놀기만 했대요. 그래서 그런지 다 큰 처녀가 되어서도 모양을 내거나 화장을 하는 따윈 전혀 못 봤다고 그러셨어요. 그거야 연애하기 전이니까 그랬겠죠.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잖아요. 우리 부모님 얘기로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딸이고, 무어든 지가 다 알아서 하고 부모 속을 전혀 썩이지 않았다고 노래를 하셨으니까요. 그렇게 부모의 자랑거리로 여고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 부모님의 노래를 중지시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꿈엔들 생각이나 하셨겠습니까. 그 똑똑한 딸이 대학입시에 낙방을 하다니요. 그래도 부모님은 아무 말씀 없으셨습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상심할까만을 걱정하시며 살피는데 "짜식들, 채점착오지 뭐"하며 오히려 당당하게 표정하나 찌그리지 않더라며 가슴을 쓸어 내리셨어요.
그렇게 시작된 내 인생의 일단정지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청량리 대왕코너에 있는 영어학원을 찾아가 영어를 배우다 성경을 배우게 되고 침례를 받기까지 그리고도 인생의 실마리가 잡혀 술술 풀리기까지 만 칠 년이 내 인생의 암흑시대였습니다. 이 정도면 일단 정지 치고는 결코 짧은 정지는 아니었습니다.
혈기왕성한 시기, 아무 것도 겁날 것 없는 젊음의 세월이 방구석에 처박혀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자살하지 않고 살아왔는지 기이한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학교도, 직장도, 연애도, 결혼도 진짜 뭐 되는 것이 없었으니까요. 나름대로 노력도 했고 발버둥도 쳐본 것 같은데 이가 하나 빠진 톱니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듯이 내 인생도 완전 정지상태 그 자체였습니다.
그야 물론 고집을 부렸습니다. 학교는 딱히 전공하고 싶은 과목을 찾지 못한 채 우왕좌왕 했고,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 찾아서 하겠다고 막무가내였고, 직장은 넘고 쳐진다고 써주질 않고, 지금 얘기니까 쉽게 들리지만 그땐 정말 죽을 맛이었어요.



2
결국 청량리 대왕코너로 날 몰아 부치신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거기까지 찾아갔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집이 대한극장 앞인데 영어를 배우러 왜 그리 먼 곳까지 갔겠습니까. 가까운 충무로, 을지로, 종로에도 미국사람이 가르치는 영어 학원이 즐비했거든요. 내 곧은 목을 꺾으시기까지 하나님 애 많이 쓰셨어요. 어르고, 달래고, 끌어주시고, 하루도 빼지 않고 지켜보시며 내게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나 스스로 발걸음을 옮기도록 기다리시느라 나의 칠 년을 쓰신 겁니다.
내 인생에 가장 값나가는 시기의 칠 년을 빼서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 칠 년을 빼느라 갖추지 못한 여러 가지를 몇 배나 채워주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머리가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갖춘 조건이야 꼬리가 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지만, 아니에요. 하나님께선 그런 부족한 나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이시는 SAMPLE로 쓰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이 어려운 이민사회에 뛰어들어 다른 사람들을 누르고 머리 부분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엄청나게 큰일에 이르기까지 매사를 제일 먼저 하나님께 아뢰고, 여쭙고, 허락 받으며 살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머리가 되어 있더란 말입니다. 때론 기다려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다고 내 멋대로 결정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선 절대로 나를 떠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결코 하나님을 놓지 않았으니까요. 때로는 "바로 이것이 하나님 뜻이라고 믿겠습니다" 라고 급히 결정하곤 양해를 구하기도 했지만 그런 조급함을 나무라지도 않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순간마다 외친들 이 감사함을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저 배시시 웃는 모습으로 항상 그 감사함을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만 아는 표현인 셈입니다.
아주 속상한 얘기를 하면서도 얼굴엔 평화로움과 미소가 번져있으니 아무도 그 속상함의 심각성을 알아주지 않는 경험도 합니다. 그런 때라도 난 하나님께 떼를 쓰면서 다 책임지시라고 제법 당당하게 맡겨버립니다. 만약 내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을 땐, 잠깐 "감사합니다"를 잊은 순간입니다. 그건 정말 잠깐입니다. 곧 하나님께 떠맡기는 것을 다시 생각해 냅니다.
살다가 일단정지를 만나면 한번쯤 곰곰이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에게 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하니까요. 자칫하면 내 자신의 능력으로 무엇이던 해결하려고 무리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일단정지는 끝을 모르고 계속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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