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내 몫이지

2004.05.02 09:59

노기제 조회 수:654 추천: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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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08                          그것도 내 몫이지
                                                                                       노 기제

   고속도로 운전을 못하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해 도움을 청한다. 세 놓고 있는 집에 이곳 저곳 수리 명령이 떨어졌단다. 관청에서 나온 명령이니 정해진 날짜 안에 완전히 보수공사를 마쳐야 한다. 아니면 벌금이 책정된다.

   문제는 세 살고 있는 사람과 연락이 안 되어 손을 쓸 수가 없단다. 분명 사람이 살고 있으니 찾아가면 만날 수 있을 텐데 혼자는 갈 수가 없고 딱히 누구에게 부탁하기도 그렇다며 말끝이 흐려진다. 어려운 사정 얘기하는 모습이 고맙다. 내가 도울 수 있으니 신난다.

   함께 가보니 상황이 심각하다. 세 살 네 살 된 듯한 고만 고만한 꼬마들이 너 댓 명 호기심에 찬 눈으로 번갈아 내다본다. 그리곤 급히 안으로 숨는다. 뒤뜰로 통하는 철망 문이라 애들과 개는 보이지만 문에는 아주 큰 자물통이 달렸다. 두들겨도 대답이 없다. 꼬맹이들에게 말을 건네야 하는데 스페인어가 짧다. 영어는 꼬마들에게 안 통한다. 기껏해야 몇 살이니? 이름은? 그 정도론 안에 어른이 있는지 꼬마들과는 어떤 관계인지 알 길이 없다.
 

   번번이 전화도 안 받고, 아이들 통해 전언을 남겨도 전화를 주는 일도 없었단다. 게다가 집세가 두 달이나 밀린 상태란다. 혼자 속을 끌이고 원망도 하고 뻔뻔함을 탓하다가 친구는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그 좁은 공간에서 아들, 딸, 손주들과 볶아대며 사는데 오죽하면 집세를 못 내며 살겠나. 부족함 없이 사는 우리 들에 비하면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다. 누군 넉넉히 사는 것 싫어서 저러고 사나. 형편이 좋은 내가 저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지.
 

  마음을 바꾸고 나니 속도 편해지고 그들을 불쌍하게 생각하며 전화를 하니 저쪽에서도 반응이 달라졌다. 그 동안 불손하게 전화를 받던 아들아이가 자기 엄마가 집에 있을 시간을 알려주어 급하게 나선 걸음이다.
 

   운전하는 나도 답답하다. 이왕이면 좀 빛나는 일에 시간을 쓰고 싶다. 가서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냥 허탕만 치고 온다면 억울할 것 같다. 그러나 하늘에 맡기자. 분명 오늘 이 어려운 걸음에 보상을 해주시리라. 그렇담 내 친구는 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날마다 신경 쓰고 골치 앓던 일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싶다. 그럼 나도 보람있는 일을 한 셈이다.
 

   한참을 문전에서 맥없이 사람을 찾던 친구가 좀 큰 여자 애를 보고 반갑게 말을 부친다. 아이린이 집에 있느냐고, 내가 온 것은 집을 깨끗하게 고쳐주려고 왔노라고. 아주 부드럽게 최선의 호의를 보이며 말한다. 역시 아무 대답 없이 안으로 사라진다. 저런 망할 놈의 계집애. 대답도 없이 저 버르장머리하곤. 난 그만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래도 친군 여전히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로 다시 사람을 찾는다. 이대로 문전박대 당하고 돌아가게 된다면 난 그만 악을 쓰며 그 잘난 영어로 욕지거리를 할 것 같다. 이런 형편없는 것들. 아예 내 쫓아 버리지 뭘 와서 사정사정 하느냐고. 뻔뻔하기도 하지. 저렇게 많은 식구가 득시글거리며 살면서, 집은 다 망쳐 놓고, 집세까지도 안 내고, 안에 있으면서 내다보지도 않고, 그냥 버티겠다 이거야. 원 사람이 사람 같아야 말을 하지. 저런 것들하고 상대를 해야하니 화가 치민다. 친구에게 당장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얼마를 땡볕아래서 그러고 있었을까. 드디어 몸이 우리보다 두 배나 되는 여자가 모습을 나타낸다. 친구가 반색을 하며 인사를 한다. 너 집에 있었구나. 나 좀 도와줘. 일주일 동안에 아주 많은 곳을 고쳐야 하는데 네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거든. 깨끗이 고치고 살면 너도 좋잖아. 이제라도 널 만나게 돼서 다행이다. 기간 내에 안 고치면 벌금이 나오거든.
 

   결국 살살 달래서 문 열게 하고 수리공을 소개해서 일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 동안 강제로 쫓아 낼까봐 전화를 안 했단다. 친구의 걱정거리가 해결됐다. 내가 주인이니까. 넌 집세를 안낸 나쁜 사람. 이런 이치를 떠나 인간적으로 애정을 갖고 감싸는 친구의 문제 해결법을 지켜보며 얻은 것이 있다.
 

    남을 불평하기 전에 내게 주어진 몫이라고 여기는 마음이다. 내 몫이라면 일이 잘돼서 내가 편히 살 것이고 내 몫이라면 불쌍한 사람에게 집 빌려주고 집세를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내가 평안해지는 이론이다. 언제고 누군가 내 도움을 필요로 한다면 열 일 제쳐두고 기분 좋게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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