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지못한 오해

2004.05.02 07:49

노기제 조회 수:575 추천:115

030501 풀지 못한 오해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계절까지는 기억이 없지만 춥지도 덥지도 않은 봄날쯤으로 생각된다. 학년이 바뀌면서 새로운 아이들과 만나고 반장, 부 반장, 분단장 등 필요한 직책들도 뽑았다. 서로의 얼굴들이 익어 떠들고 놀기 좋아진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시며 반장에게 떠드는 사람 이름을 칠판에 적어 놓으라고 지시하셨다.
수업시간에 아이들만 남겨두고 어디를 가시는 걸까? 무슨 일로 얼마나 오래 있다 오겠다는 말씀도 없었다. 책을 읽으라던지 자습을 하라던지 확실하게 뭔가를 시키지도 않고 무조건 떠드는 사람 이름만 적으라니 정말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반장이던 장 건수는 앞에 나가 칠판 오른쪽 구석에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화장실 가겠다고 일어서던 아이 이름을 쓰는 거다. 저런, 쟤가쟤가 뭐 하는 짓이야? 변소 가겠다는데 뭘 잘못했다고 이름을 쓰는건지. 아무래도 설명을 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곤 손을 들고 반장을 불렀다. 어렵셔, 이번엔 내 이름을! 저 자식, 저거 반장 맞아?
속수무책으로 꼼짝도 못하고 숨도 크게 못 쉬며 얼마를 지냈을까. 칠판에는 열명도 넘는 이름들이 쓰여졌다. 그 중에서 진짜 떠들어서 이름이 적힌 아이는 없었다. 손을 움직였다던가, 머리를 긁었다던가, 책장을 넘기며 소리를 냈다던가, 하여튼 그런 종류의 억울한 죄인들뿐이었다. 실제로 시간이 얼만큼 지났는지 몰랐지만 한 시간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우리 담임 유 지화 선생님은 아주 이쁜 여자 선생님이다. 살결도 하얗고 언제나 밝은 표정이며 쌍꺼플진, 눈이 큰 미인형이라고 엄마가 말씀 하셨다. 이 학년이 되면서 엄마는 벌써 선생님 찾아 뵙고 인사 드리며 잔잔한 치맛바람은 형식처럼 지나간 후였다. 못난 딸자식 잘 봐달라는 부탁이 아닌 너무 유별나게 똑똑한 아이 다스려 줍시사는 부탁의 치마바람인 셈이다. 그 당시 학교 선생님들이나 학부형들 사이에 나는 '보통이 아닌 아이'로 소문난 상태였으니까. 쉽게 말하면 요즘 초등학교 2학년생 수준의 아이가 48년 전에 있었다면 그 아이는 분명 보통아이들과 같이 보일 수 없는 아이었다고나 할까.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신지 얼마나 되었을까? 무슨 좋은일이 있었는지 환하게 웃으며 드디어 돌아오셨다. 대뜸 칠판에 이름이 적힌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했다. 손바닥을 한 대씩 때렸다. 내 차례다. " 부 반장이 같이 떠들면 어떻하니?" 하시며 두 대를 세게 때렸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있나 싶어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반장이 한일이 틀린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떠든다는 말의 뜻을 설명하고 싶었다. 너무 답답해서 자꾸 울고만 있었다. 억울하기도 했다. 반장이야 아이니까 그렇다치고 선생님의 하시는 처사가 못마땅해서 따져 묻고 싶은 것이다. 처음부터 그런식으로 아이들만 남겨두신 일이 많이 틀린일이라고 알려드리고 싶었던거다. 게다가 자초지종을 알아보실 생각도 않고 회초리부터 들다니.
수업을 시작해야 하는데 내가 계속 엎드려 울고 있으니 난처하신 모양이다. "기순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자."라는 정다운 음성이 들렸다. 그렇지. 선생님은 내가 말하면 금방 알아차리실 테니까 일어나서 설명을 하자. 눈물을 닦으며 선생님을 향해서 눈을 뜨는데, "아니, 너 어디다 눈을 흘기는거야?" 라고 뾰족한 소리가 얼굴을 친다.
그때 내 자리는 복도쪽을 향해 앉았고 칠판이 있는 쪽을 보려면 왼쪽으로 얼굴을 45도 가량 돌려야하는 위치였다. 분단을 여덟로 만들고 각 분단마다 여덟명씩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앉게 했다. 나는 창가에서 복도쪽을 향했지만 내 앞의 아이는 창쪽을 보고 앉아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칠판을 보려면 몸을 아주 획 돌려 앉아야한다. 그런데 울다가 고개를 드는 도중이라 그 동작이 금방 나와주지 않았던거다. 노발대발 그 이쁜 선생님의 눈이 갑자기 괴물의 형상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럴 땐 차라리 입을 다물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한들 선생님의 노하심을 진정시킬 수가 있겠는가? 아니라고 설명을 하려하면 말대답한다고 더 화를 내실거란 확신이 들자 그만 입을 봉하고 때리는 대로 맞고 있었다. 엄마한테 얘기를 할까? 그럼 엄마는 선생님을 찾아와서 뭐라 하실 수 있나? 그헣게 해도 선생님이 자신의 경솔함을 인정하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곤란 해 지겠기에 그만 끝까지 입다물어 버렸다. 오늘 이 시간까지.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던 선생님을 지금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날 내 손바닥은 수도 없이 맞은 탓에 벌겋게 부어 올랐다. 아무 말 없이 소리한번 안 지르고 맞고있던 내가 선생님은 진짜로 미우셨던 모양이다.
아직 어딘가에 생존해 계시다면 꼭 만나 오해를 풀고 싶다. 장 건수, 반장 했던 아이도 꼭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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