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마장 가는길

2003.02.02 08:55

노기제 조회 수:611 추천:103

062801 승마장 가는 길
노 기제
주말이면 평일보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 신나게 놀기로 작정을 했기 때문이다. 한 시간이건 두 시간이건 일찍 일어나는 일에 불평은 없다. 간혹 몸이 따라주지 않아 피곤하긴 해도 내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할 수 있다는 기쁨이 앞선다. 자명종 시계의 도움 없이 예정된 시간 전에 눈이 뜬다. 결국 잠을 설치게 된다. 그 시간을 기다리는 심정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다. 얼마나 하고 싶던 운동인데 잠 좀 덜 잔들 대수랴.
말을 타고 싶어하던 소녀 시절엔 친정 아버지의 반대로 실현할 수가 없었다. 처녀가 할 운동은 아니라고 딱 잘라 거절하셨다. 고명딸 사랑함이 극진 하셨지만 다 거짓말 같았다. 하고 싶다는 운동은 못하게 하시면서 그게 뭐 사랑이냐고 투덜댔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기회가 되면 반드시 말을 타겠다고 갈망하면서 25년을 보냈다. 그 사이, 한국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이 바뀌고 결혼도 했고 직장생활도 하니 모든 조건이 충분하다. 때마침 대한 승마 협회에서 강습생을 모집했다. 함께 시작했던 남편이 한 달만에 물러나면서 "비싼 운동은 자기나 해. 난 돈 안 드는 등산이나 할게" 라며 승마에 필요한 장화랑 승마복을 구입해줬다. 친정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다면 어깨 으슥해 보이며 뽐내고 싶었다.
이렇게 대단한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된 나의 15년 승마 이력은 운동을 한다는 단순한 개념 이상이다. 말 등에 올라타면 말로 표현하기 힘든 충족감을 느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공기를 마시며 승마장을 향해 갈 때는 마치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기분이 되기도 한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두지 않건만 내가 달리는 고속도로에 있는 모든 차량들은 마치 나를 개선장군으로 대접하듯 고개를 조아린다. 순식간에 나는 말 잔등에 높이 앉아 고개를 빳빳이 세운 장군의 모습으로 변한다. 세상을 발아래 두고 호령하는 집권자가 된 듯한 착각도 한다. 이런 기분이 바로 권력을 잡은 자들로 하여금 장기 집권을 탐하게 하나보다.
고속도로를 빠져 나와 일반도로로 10분쯤 가면 드디어 말 냄새가 바람결에 다가온다. 좌회전을 하고 100미터쯤 남은 길은 비포장 도로다. 마장을 코앞에 두고 흙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내 앞길을 흐려놓는 차량이 있다. 미리 보았으면 피할걸. 말끔한 내 차가 억울하게 흙먼지를 뒤집어쓰는 수모를 당하는데 속수무책이다. 보고만 있자니 열통이 터진다. 흰자위를 있는 대로 넓혀서 눈을 흘긴다. 차를 향한 눈 흘김인지 운전자를 향한 눈 흘김인지 나도 모른다. 심하면 입으로 터져 나올 듯한 향기롭지 못한 표현을 자제하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정작 마장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면 앞서가며 흙먼지 일으킨 운전자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언제 내가 그 사람에게 눈을 흘겼더냐고 태연하게 웃어준다. 이럴 때면 난 생각한다. 때로는 내가 앞서가며 흙먼지 일으켜 뒤 차량에게 피해를 줄 때도 있을 테고 눈흘김을 받기도 하겠지. 흙먼지 뒤집어쓰면 세차하면 끝나지만 씻어서 해결 안 되는 상처를 알게 모르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준 일은 없었는지. 자신만 좋으면 기어이 하고야 마는 아집으로 많은 사람들 피곤하게 한 일은 없었는지. 한 번쯤 다시 생각해보며 매사에 처신한다면 이 세상은 더불어 살기에 조금 더 상큼한 곳이 되지 않을까.
흙먼지 뒤집어쓰고 씁쓸해진 기분이 킹과의 대화로 말끔히 씻겨지는 승마의 매력. 더구나 킹이란 녀석은 이름답게 위세가 당당하고 활기차고 멋진 체격을 가졌다. 그 녀석 등에 안장을 지우고 올라앉으면 맑은 새벽공기 마음껏 호흡하며 마악 솟아오르는 태양을 향해 지구 끝까지라도 질주하고 싶어진다.


2
이 세상 모든 것을 내 손안에 거머쥔 듯한 넘치는 자신감. 세상에 두려울 게 없는 마음, 내가 가진 것 모두 나누고 싶은 풍족함, 내게 더러운 오물을 뒤집어씌우는 그 누구라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 바로 말 위에 올라앉아 달리며 얻어내는 귀중품들이다.
이렇게 너무 너무 하고 싶었던 승마를 통해서 나는 나를 돌아보곤 한다. 오늘 하루 나의 생활에서 흙먼지 일으키며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 일 없었는가. 아침잠 설쳐가며 내가 좋아서 달려가는 승마장 가는 길은 내게 삶을 향한 자세를 귀뜸 해준다. 아마도 그 길은 영원히 비포장 도로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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