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퍼렇게 멍든 첫사랑

2003.02.16 03:44

노기제 조회 수:765 추천:86

081621 시퍼렇게 멍든 첫 사랑
노 기제
"집사님은 내가 밤 낮 질질 짜고 사는 것 바라지 않지?"
약간은 어설프게 청첩장을 내어 밀던 S 여사의 변명이다. 물론이죠. 이왕 간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산 사람은 잘 살아 야죠. 떳떳하게 재혼하라고 용기를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S 여사 부군이 새 신자로 우리 교회에 출석하면서 교회 일에 열심을 내던 모습에 먼저 믿은 신자들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S 여사의 주문이 유별남에도 언짢은 기색 전혀 없으셨던 분. 누구보다 일찍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 준비며 문단속이며 기성 교인들까지도 잘 챙기시던 분. 구역반에 새 신자 데려오기, 성경공부 인도까지 짧은 기간에 교회에서 지도자에게 요구하는 제반 사항을 철저하게 해낸 분이다.
몇몇 여자 집사들은 교회에 출석하기조차 꺼리는 남편들과 살면서 교회 오는 날은 과부 아닌 과부 생활을 하는데 S 여사는 호통을 치며 남편에게 자못 명령이다. 그렇다고 무엇하나 S 여사보다 빠지는 분도 아니고, 미남에 키도 알맞고 지적인 면도 S 여사보다는 훨씬 윗길이다. 더구나 마음씨는 태평양 넓은 바다와 같다. 한 번도 사라짐이 없는 미소가 그 분의 얼굴이다. 음성은 또 어찌나 부드러운지 무슨 일이든 부탁만 하면 다 들어준다.
교회에 들어온 이유가 남 몰래 울며 기도하던 아내의 모습을 보았던 때문이란다.
S 여사의 확실한 믿음과 기도가 이끌어 낸 결과로 하나님의 충성 된 종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헌신하며 신실하게 교회생활 칠 년 정도 함께 했는데 차츰 출석이 뜸해졌다.
한 주 빠지고 두 주 빠지고 의아해 하는 교인들에게 들리는 소리는 건강이 조금 나빠져서 좀 쉬겠다고 한다. 별 일 없이 휴식이 필요한 줄 알았다. 한 달지나 복수가 차고 두 달되어 말기 간암 환자가 되고 석 달째엔 그냥 조용히 잠들었다.
S 여사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들리는 소리로는 S 여사가 첫 사랑을 만나 한국까지 나갔다 오기도 하고 단체로 관광을 갔는데 그 첫 사랑도 함께 였다는 둥 끝 무렵에 남편 속을 엄청 썩혔단다.
남편 떠난 지 반 년만에 그 첫 사랑 남자와 재혼한다고 청첩장을 돌린 거다. 이왕 그렇게 된 일. 잘 살기를 바랬다. 더구나 그 첫 사랑과 헤어진 이유가 S 여사 집안이 가난해서 부잣집인 남자 부모가 반대를 했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도 그 남자는 한국에 재산이 엄청 있고 부인과는 오 년 전에 사별하고 재혼을 미루고 있다가 S 여사를 다시 만났다는 사연이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언제 다시 만났는가는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남의 얘기지만 듣는 입장에 있는 여자들은 하나 같이 부러운 눈빛이다. 첫 사랑과의 사연이 있는 여자라면 더더욱 간절한 마음이 되어 꿈이라도 한 번 꾸어보고 싶은 낭만적인 기분이 되기도 한다. 복두 많지 뭐야. 그렇게 멋진 일이 다 있으니, 더구나 돈도 많다며? 누구는 좋겠다. 난 뭐야. 그런 추억거리 하나 없으니.
많은 여자들 가슴을 설레게 하며 결혼식도 했고 S 여사의 실력이 발휘되면서 새 남편도 교회에 출석하게 했다. 교회에서는 S 여사의 남편 전도하기 실력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먼저 남편에 비하면 어느 구석하나 더 높은 점수를 줄 수가 없어서 우린 그냥 미소로 그 분을 대한다. 역시 S 여사 부부의 속사정은 모르는 채 삼 년이 흐르고 한 동안은 S 여사만 모습을 보이더니 요즘은 S 여사의 모습도 안 보인지가 몇 달이다.


2
첫 사랑과의 재회로 가슴 들 뜬 시간이 얼마나 갔을까? 현실엔, 자상하고 부드럽고 섬약한 인품의 남편대신 웃음을 전혀 배우지 못 한 표정에 태권도로 다져진 근육질 마음과 자기 소유는 일 전 한푼 쓸 줄도 모르는 굳은 남자가 있을 뿐이다.
한국에도 몇 개씩 소유하고 있다는 태권도 도장을 미국에다 차리면서 S 여사 전 남편의 생명보험이 다 털려 들어가고, 그 남자 전처 소생인 아들 결혼식에 S 여사는 집을 팔아 비용 쓰고 지금은 아파트에서 그 남자 둘 째 아들도 함께 살고 있다는 뒷 얘기다.
혼자 살았으면 남은 생애 편안히 지낼 만한 재산을 짧은 기간에 다 쓰고 지금은 벼룩시장 땡 볕에서 무슨 장사를 하고 있다는데 믿을 수가 없다. 교회라면 혼신을 다해 섬기던 S 여사가 아니던가. 남편 두 사람을 억척스럽게 교회로 인도했던 S 여사가 아니었나. 그런데 교회마저 몰라라 예배 드리는 날 시장에서 장사라니.
그 남자, 돈도 많은 사람이라 더니 있으면서 안 내놓는 건가, 아니면 빈 털털이가 된 첫 사랑을 구제했던 건가. 적지 않은 돈 들여 차려 논 태권도 도장마저 한가해서 수입이 없고 경비만 계속 지출해야한단다. 어떻게 해야 하나.
오십대 중반에 다시 만난 첫 사랑 그 사람은 애당초 만나지 말아야 했던 사람은 아니었을까. 이루지 못한 사랑 그대로 가슴에 간직했더라면 한 조각 아름다운 추억을 소유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이제와 가슴을 치며 잠든 사람 그리는 S 여사의 울부짖음이 허허롭게 들린다.
첫 사랑과의 재회! 그래도 여전히 많은 여인의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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