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앓이 치료법

2003.02.16 03:47

노기제 조회 수:629 추천:82

093001 가을앓이 치료법
노 기제

연애가 하고 싶다. 누군가 나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다면 좋겠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나만을 생각하며 살고있는 사람이 있을 것도 같다. 어쩌면 내가 모르게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내 모습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모습을 안 보이면 보일 때까지 비를 맞고 기다리고 있을 그 사람. 우산도 없이 몇 시간이고 전신주에 몸을 숨기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 한 번쯤 만나보고 싶다. 그 어깨에 머리를 쉬고 싶다.
이쯤 되면 정신병도 중증이란 진단이 내릴 것이다. 그러나 의사에게 가지 않고도 나는 나의 이 병을 치료할 줄 안다. 한 두 해도 아니고 증상이 심하다고 느낀 지가 벌써 오래다. 어릴 적엔 사춘기도 모르고 지난 내가 청장년 바쁜 시절 다 지난 후 몸과 마음이 차츰 느리게 반응하면서 생긴 희귀한 병이다. 그것도 꼭 찬바람이 살그머니 찾아와 내 가슴을 파고드는 계절이 시작되면 난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집안에 폭 들어 박혀 있어도 난 알몸으로 광장에 놓여진 조각이 된다. 수많은 인파가 몰려오고 몰려가고 하는 사이 나를 목숨걸고 갖고자 하는 백마 탄 왕자님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 왕자님은 나를 차지하지 못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까지 혼신을 다해 나를 향한 열정을 바치는 왕자님을 보면서 그 뜨거운 사랑으로 인생의 한 장을 접는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이번엔 내가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 조각이 되어 그 사람을 잡을 수도 없고, 말도 못하고, 키스도 할 수 없는 그런 애처러운 사랑을 하기도 한다.
처음 증상이 시작되던 해에는 정말 숨이 막히도록 앓았다.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끙끙 앓으면서 인생을 송두리째 던져버리려고 맘을 먹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잠깐 지나치는 짧은 기간이었다. 소슬하니 가슴을 파고들던 바람이 좀 더 차가워진다. 얄팍하던 긴소매 블라우스가 찬바람을 견디기 힘들어 할 때 두툼한 겉옷을 챙겨 입는다. 머리는 높은 가을 하늘이 되어 어느 때보다도 명석해진다.
그리곤 곁에 있는 남편의 모든 것이 소중하게 생각된다. 백마 탄 왕자님은 이미 내가 차지한 지 오래다는 것을 다시 인식하며 헛된 욕망 한 꾸러미 쓰레기통에 버린다. 다시 찾은 일상에서 열심히 산다. 한바탕 앓고 난 내 가슴에 상처가 남았는가 찾아보아도 아무 것도 없다. 분명 깊은 생채기 한 둘쯤 있을 줄 알았는데 흔적조차 없다. 꿈을 꾸었던 게다.
해마다 같은 무렵이 되면 영락없이 스며드는 첫 증상을 대면하면서 비디오 대여점을 찾는다. 요즘 젊은애들 가슴 시리게 연애하는 드라마 좀 골라달라면 킥킥거리며 몇 개 추천해준다. 나이 지긋한 아줌마가 젊은애들 연애하는 드라마를 찾으니 웃음이 날 수 밖에. 그렇게 웃음거리가 되고 마는 편이 가을앓이로 추해지는 편보다는 감당해 내기가 훨씬 가볍다.
그 다음은 집에서 혼자 죽을 쑤다 밥을 하다 북도 치고 장고도 치며 푸닥거리가 어지럽다. 드라마 속에 주인공이 되어서 짜릿한 연애도 하고 눈물을 펑펑 쏟기도 하고 뱃속이 다 들어 나도록 큰 소리로 웃어보기도 한다. 밤을 새워서라도 한꺼번에 일곱 개도 본다. 보통 비디오 테이프 하나면 한 시간 반정도 걸린다. 퇴근한 남편과 저녁상 차려 함께 하면 수저 놓기가 바쁘게 다시 시작이다. 슬그머니 설거지 해주고 자리 피해주는 남편이 눈물나게 고맙다. 이럴 땐 그냥 내버려 둬주는 것이 가장 잘 도와주는 것이다.
처음엔 빨랑 들어와 자라고 소리도 지르고 투덜대기도 하더니 이젠 많이 이해 해준다.

2
밤새 잠 안자고 비디오 봤다고 아침 식사 거르게 한다던가 출근에 지장이 있다거나 아무런 하자가 없으니 사실 야단치기도 그렇긴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가을앓이로 연애하고 싶다거나 사랑하고 싶다고 털어놓는 것도 아니었으니 영문은 모르지만 뭐든 지가 좋아하는 것이면 물, 불 안 가리고 빠져 들어가는 못 말리는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쨋거나 따지고 묻고 자라고 욱박지르지 않는 것만 그저 감사 할 뿐이다.
이렇게 한 삼, 사주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싸악 가셔버린다. 너무도 이지적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비디오 보면서 시간만 죽이는 사람들 흉까지 거침없이 보기도 한다. 그 시간에 성경을 읽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그런 드라마는 뭘 그리 혼을 빼면서 보느냐고 안면을 싹 바꾼다.
그러다 혹시 가을앓이로 가슴이 시린 친구의 푸념이라도 듣게되면 얼른 비디오 가게 가서 드라마 빌려다 보라고 일러준다. 누군가 자기를 짝사랑 하다가 아직도 총각으로 살면서 기다리는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던가, 아니면 죽도록 사랑하다가 이루지 못해서 자살을 한 남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성치 못한 소리를 중얼대는 이들에겐 드라마 처방전이 주어진다. 나에게처럼 약발이 확실하게 듣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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