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을 믿어

2003.02.16 03:52

노기제 조회 수:770 추천:86

신발을 믿어
노 기제
"나 할 수 있을까?"
자일이며 카라비나등 각종 하니스(harness)를 챙기기에 바쁜 산악회 총무에게 지나가는 말로 던져 보았다. 별 신통찮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등 해 보이며 평상시 나의 운동 경력을 떠올려 보더니, "형수 실력이면 할 수 있어요" 라고 비교적 쉽게 대답한다. "정말?" 나이를 염두에 둔 나의 확인 물음에도 역시 대답은 할 수 있다로 용기를 준다.
전문가가 할 수 있다고 인정해 준다면 한 번 해 보는 것도 어쩌랴 싶어 부리나케 준비를 했다. 주위에는 우리 산악회 회원 외에도 대 여섯 팀들이 간격없이 자리를 잡고 준비중이다. 아직 선두가 올라가지 않은 팀도 있고 혹은 이미 꼭대기까지 올라가 자일이 길게 늘어져 있는 팀도 있다. 바위아래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순서 없이 섞여 있다. 각 팀마다 실력에 따라 이곳 저곳을 선택 한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거대한 한 덩이 바위일 뿐인데 안내판에는 스물이 넘는 코스가 표시되어 있다. 대충 네 종류로 분류되어 화이브 식스는 초보자를 위한, 화이브 나인과 일레븐은 중급자를 위한, 그리고 식스 이상은 전문인들이 붙는 코스다. 이름하여 큰 바위(BIG ROCK) 이니 이름답게 아주 커다란 한 덩이 바위다. 270도 짜리 후레아 스커트를 입고 살포시 앉은 여학생의 자태를 연상케하는 고운 모습의 바위다.
청년회원의 도움으로 하니스 착용을 끝냈다. 분명 남자들의 소유인데 허리가 넉넉지 않아 애를 썼다. 아하, 30년 전 처음 바위를 타던 그때의 내 허리가 아니구나. 바위 타기는 겨우 두 번째인데, 내 태도는 지난 30년 동안 계속해서 바위를 가까이 했던 사람인양 태연했다. 허리를 어찌나 조여댔는지 숨쉬기도 수월찮다. 발에 신은 바위 타기 용 신발은 조금 큰 듯 한데 엄지발가락이 눌리는 느낌으로 아주 불편하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자꾸 발가락에 신경이 쓰였다. 바람이 부는 탓인지 왼쪽다리가 갑자기 후들거린다. 순간 그만 두자는 내부에서의 외침이 제법 시끄럽게 들려온다.
신발을 벗었다. 발가락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듯하다. 양말을 집었다. 그때, "양말 신지 마세요. 맨발이 나요" 라는 빠른 소리가 나를 제지시켰다. 슬그머니 그만 두렸더니 주위엔 많은 낯선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멋적게 웃어주곤 다시 신발을 신었다. 오늘따라 왠 모르는 사람 천지람.
"다음, 형수? 오세요" 차례가 되었구나. 어쩌나.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자신은 점점 없어지고, 지금이라도 물러서는게 좋을성 싶은데, 말할 용기는 없고 자석에 끌리듯 시발점으로 닦아갔다. 허기사 내가 언제 또 이런 기회를 가질까, 이왕 뽑아든 칼자루 한 번 휘둘러나 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막상 바위에 붙고 보니 그렇게도 쉬워 보이던 바위가 도무지 발을 옮겨 딛을 곳이 없다. 내가 뚫어져라 째려보면 바위에 구멍이라도 나겠지. 그러면 발을 옮길 수가 있으려니 생각했다. 무섭게 집중해서 이곳저곳 뚫어져라 째려본다. 그래도 아무 변화가 없다. 에라 그냥 한번 발을 옮겨보자. 보통 상식으론 발을 붙일 곳이 전혀 아니다. 손 위치도 마찬가지다. 손톱 끝을 바위에 박으란다. 무슨 허튼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게 먹혀 들어간다. 손끝에 힘을 주고 발을 옯겨 가며 내 체중을 들어 올렸다.
제법 잘 올라가 진다. 무릎을 바위에서 떼야한다. 잘못하면 무릎이 나간다. 될 수 있는대로 무릎은 펴고 양쪽 발끝에 힘을 모으고 서야한다. 어느새 두려움은 사라지고 그렇게

2
후들거리던 다리도 얌전해졌다. "이거 별 것 아니네" 하며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아 나는 듯 자신감도 생겼다. 그 순간, 아아악, 왼 손에 분명 힘을 주었는데 딱 붙어야 할 손가락들이 찌익 미끄러지며 다리도 따라 흘러내렸다. 어찌된 셈인지는 몰라도 결국은 여기서 그냥 땅으로 떨어지겠구나 라는 비교적 차분한 체념을 했지만 그 다음 동작이 마비 상태다. 미끄러진 왼쪽 다섯 손가락 모두가 얼얼하니 아프다. 왼쪽 발가락도 아프다. 아직 땅은 아니다.
"신발을 믿어. 계속 올라가" 제법 강한 명령이 떨어졌다. 다시 힘이 났다. 할 수 있다는데 왜 자꾸 주저 앉으려만 드나. 아픈 손가락에 힘을 더 주며 바위를 끌어안았다. 신기하게 다시 올라가진다. 곧 끝나겠지. 숨이 차 오른다. 다시는 하지 말아야지. 조금만 더. 조금만 더....아이구 아버지 도와주세요. 그러다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 갈만한 틈새를 발견했다. 양쪽 발 함께 딛고 편히 설만한 작은 쪽편도 찾았다. 자신있게 잡고, 딛고, 몸을 띄우다보니 확보해 준 선두와 함께 섰다. 안도의 숨과 함께 아래를 보니 모두들 박수를 보내온다.
이젠 내려갈 차비를 해야한다. 그때 누군가 기다리라고 외친다. 꼭대기까지 가도록 확보 해 주겠다며 아래에서 나 있는 지점까지 단숨에 날아오를 기세다. 맙소사. 지금 이 지점까지 오른것도 꿈만 같은데 오른만큼을 또 오른다는 건 절대 안된다고 악을 썼다. 손과 다리에 힘이 빠져서 못하겠노라고 사양했다. 능력을 인정해 주는건 감사하지만 나는 나를 안다. 여기가 지금의 나에겐 한계점이다. 곧 내림질을 시작했다.
내가 바위를 타고 싶은 이유는 바로 이 내림질 때문이다. 박자 맞추어 바위를 차면서 짠 짠 그네 타듯 내려오는 라펠링의 맛. 그러나 그 자세는 자기 자신이 자일을 조정하면서 내려올 때 할 수 있다. 이번처럼 위치를 확보해 준 선두가 풀어주는 줄로는 할 수 없다.
아쉬운대로 30년만에 다시 바위를 탔다. 할 수 있다고 말해준 총무에게 감사한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을 때 신발을 믿으라고 소리쳐 준 사람에게도 감사한다. 꼭대기까지 넉넉히 올라갈 수 있다고 믿어준 사람에게도 감사한다. 요즘같은 첨단 장비를 사용하면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 겁만 먹지 않는다면. 순간 이 세상 어디에 있는 바위라도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의기양양해진다. 지금의 내 나이는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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