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은 옷을 챙기며

2003.07.11 02:00

노기제 조회 수:844 추천:83

051500 벗은 옷을 챙기며
노 기제
한 여름, 습기 찬 공기가 짜증스러워 창문을 연다. 간절히 만나고 싶었던 바람을 불러들이려 했더니 어느새 가 버렸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던 모양이구나. 그 정도 기다림에 지칠 양이면 애초부터 찾아오지나 말지. 창문을 닫으며 전기 바람을 초대한다. 아무 군소리 없이 나를 위해 바람을 만든다. 열심히 만들어 내게 보내 주건만 이건 내가 찾는 바람이 아니다. 급한 대로 옷을 벗는다. 넓은 공간에 혼자이니 다 벗은들 대순가?
어렵사리 시작한 글쓰기가 한계점에 도달했다. 내가 생각했던 글들은 이미 내 안에 있지 않다. 가슴을 스쳤던 그 느낌들을 토해 놓고 읽는다. 아니라고 내 가슴이 도리질을 한다. 그 느낌들은 어디 갔느냐고 다그쳤더니, 입을 꼬옥 다물어 버린다. 더 이상 채근할 수가 없다.

만남이 적조 했던 옛 친구와 차를 마신다. 이제 나이 들어 일상생활에 변화를 주고 싶어서 돈 벌던 일을 접었노라 했다. 돈과 관계없이 살 수 있으면 돈벌이를 접는 것도 좋은 생각이란다. 그렇다고 넋 놓고 앉아서 어찌 시간을 보내려 하냐고 사랑 어린 염려를 준다. 어릴 적부터 꿈꾸던 글을 쓰고 싶어서 공부를 이미 시작했노라고 살짝 얘기 해 줬다. '글쓰는 거? 그거 좋지. 남을 의식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자기 수양으로 아주 적격이지'
이런 친구가 내게 있다는 것이 놀랍다. 나의 가장 약한 면을 단칼에 도려낼 기세다. 그래. 바로 그 점이다. 졸작을 내밀면서도 부끄럼을 모르는 교만. 마치 후덥지근하다고 사람들 앞에서 마구 옷을 벗는 꼴이다. 그런 벗은 나를 보게 해준 친구가 고맙다. 글쓰는 자세를 일깨워 준 그 친구와 헤어져 홀로 내 글들을 정리한다. 벗어 던진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는 마음으로 내 글을 읽는다. 또 읽는다. 다시 읽어보며 처음에 가슴을 탁 쳤던 그 느낌을 찾아본다.
읽는 이에게 아무 감동도 줄 수 없는 글을 활자화해서 긴긴 세월 후회 할 일일랑 만들지 말자. 생각만 해도 낯이 뜨거워진다. 그 친구의 일깨움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칫 큰 실수를 할 뻔했다. 내 스스로 나를 돌아보자. 좋은 글이 되기까지 애정을 갖고 다듬자. 설익은 글을 세상에 내 놓아 구태여 나의 벗은 꼴을 보일 필요가 없다.
내 마음이 수정처럼 맑아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그 친구를 계속 떠올리련다. 아무 약속도 없었지만 그 친구의 마음가짐이 내 것이 되어 온전히 깨끗한 글을 쓰자. 안 쓰고는 견딜 수 없어 써 내려간 글이라면 내가 사랑 할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내 마음에 가득 찼던 후덥지근한 욕심들이 친구가 보낸 바람에 모두 도망갔다. 혼자라고 벗어 던졌던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긴다. 나를 바라보며 인내하는 친구가 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언제라도 필요하면 또 보내줄 그 친구로부터의 바람을 의식하며 차분히 옷깃을 여민다.

****글쓰기 공부 시작후 등단전의 작품이지만 글쓰는 사람의 자세를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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