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 기준에 맞추려 말자
2020.05.09 20:19
20190817 심사위원 기준에 맞추려 말자
노기제
여름방학이다. 문학과 연관 된 한국 교수님들의 미국행이 정점을 이룬다. 내가 사는 로스앤젤레스에는 열 손가락이 필요한 만큼의 문학단체들이 있다. 장르별로 분산되기도 하고 통합된 장르를 포용한 단체들로 숫자를 헤아려 본다.
1.5세나 2세 문학인들은 이미 한국어 권에서 제외된다. 그들의 제 1 언어는 한국어가 아닌 영어다.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온지 수십 년이라도 한국말을 훨씬 편하게 쓸 수 있는 세대는 연령이 높다. 자연스런 현상 아닌가.
한창 일 할 나이에 이민이란 용감한 선택을 했고, 입 벌리고 기다리는 2세들을 먹이고 키우느라 자신의 재능을 인지하지도 못한 것이다. 이민자들의 이런 나이가 된 것을, 잠깐 들러 가르치면서 아쉬워하지 말아 주면 좋겠다. 한국에서 터를 잡은 분들이 강의 중에 학생들의 나이 운운하며 양념을 칠 일은 아니다. 듣기 거북하다. 억지로 젊은 나이로 최면을 걸고 글을 써 보자는 제안도 짜증난다. 이민자들의 연륜이란 짜 맞추려고 잘라 버리기엔 무리수가 있다.
좋은 시간 다 놓치고 이제라도, 접어 둔 꿈을 꺼내 펼쳐 보려는 열의가 가상하지 않은가. 막상 시 한 줄 쓰려면 가슴속에 빽빽하게 쌓아 둔 뜨거운 언어 조각들이 숨어버리고 없다. 전공 분야가 아니었던 문학이다. 그럼에도 공부는 해야 한다. 야간 대학이라도 다녀 보고 싶다. 미국의 대학. 그건 영어로 배우는 문학이라 영어공부부터 시작이니 시간이 없다.
자식들 키워 내 보내고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되기에 악착 같이 오버타임 하던 시절은 끝났다. 은퇴가 아니더라도 쉬엄쉬엄 일하면서 글 좀 써볼까 기웃거리다 8월이면 한국의 문학인들, 대학 교수님들의 강의를 접할 수 있으니 좋은 기회다.
해 보자. 녹슨 두뇌 닦아가며 한 마디도 놓치지 말자. 이 단체, 저 단체, 가릴 것 없다. 모두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녹여 낸 자신만의 노하우를 피력하는데 우선 내 그릇에 담아보자. 담아내기에 마뜩찮은 내용들도 섞인 것을 유의해야 한다. 그분들의 이론을 율법인양 받아들이려 애쓰는 순수한 모습들이 뚜렷하게 보인다.
방금 문학에 입문했으니 강사들의 이론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되겠다는 각오로 복사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미 해를 거듭한 기성 문인들도 이런 기회를 접하면 시키는 대로 따라하려는 맹종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어떤 모양의 글을 써 왔으며 얼마만큼의 호응을 독자로부터 받아 내었는가를 돌아보자. 독자의 마음을 울리고 웃기며 함께 느끼고 친해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일이다.
무엇인가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야한다. 어느 순간 가슴을 탁 치고 사라진 그 무엇이 생겼을 때부터 가슴속에선 확실하지 않은 방법으로 숙성단계로 들어간다. 그 후에 비로소 어떻게 쓸 것인가로 고민하기 시작한다. 무엇이든 쓰고자 하는 주제가 없는데, 어떻게 쓸 것인가를 무슨 방법으로 유추해 낸단 말인가? 이것이 나의 이론이다. 강의와 반대인 셈이다.
강단에선 우선 어떻게 쓸 것인가를 생각부터 하라지만, 내 습관과는 맞지 않으니까 한쪽귀로 듣고 다른 귀로 내보낸다. 내가 틀렸었다고 끙끙대며 이해하고 고치려는 생각 없다. 내게 맞는 것만 걸러서 듣고 저장하자.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글짓기를 해온 지 20년이다. 나름대로 노하우도 정립되지 않았나 싶다. 휘둘리지 말자.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나만의 색깔이 선명해진다고 믿는다.
가까운 문우들의 갈팡질팡 애쓰는 모습이 결국에는 한 단계 높아지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등단을 목전에 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작품은 좋은데 단지 심사위원의 이론에 매치가 안 되었을 뿐이라고. 다음 기회엔 알아보는 심사위원과 만나서 꼭 등단하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위로를 주곤 한다.
한국에서 20대에 갓 접어든 풋풋한 학생들을 상대하던 교수님들의, 같지 않은 이론 강의를 무조건 듣고 내속에서 정리한다. 비록 한 시간 남짓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의 경험을 통해서 작품으로 승화시킨 결과를 눈으로 읽으면서 어떤 이론은 내 것으로 가져와 버리자.
2019년 8월에, 난 얼마나 그들의 것을 내 것으로 옮겨왔는지는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간이 좀 흐른 후에야 계산이 가능할 것이다. 심사위원도, 교수님들도, 내가 아닌 타인임을 잊지 말자. 타인의 평가에 신경 쓰지 말자. 그래야 내 글이 살아난다. 나다운 글이 탄생할 것이니 뚝심을 기르자.
2019년 미주문학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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