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키장에서 만난 소년
2020.05.09 20:07
20200102 스키장에서 만난 소년
노기제( 통관사)
번쩍 정신이 들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어떤 일일까? 그렇고 그런 일상을 훌쩍 떠난다. 뒤적뒤적 내 취미와 맞는 클럽을 찾아본다. 함께 이동하고, 같은 숙소를 정하고, 한 곳에 모여 끼니를 나누고 공동의 주제를 놓고 대화를 해 본다. 별 소득이 없다. 즐거움이 내게 오려니 기대 했지만 지나가 버린다. 잠깐이라도 행복하다 느껴질 줄 알았는데, 아니다.
점점 늘어나는 보도위의 천막들을 보면 쿵하고 떨어지는 내 심장. 게다가 날씨가 심술을 부리는 날엔 제법 많은 양의 비를 쏟아 낸다. 어쩌나. 추울텐데. 바닥이 젖으면 깔개도 덥개도 다 젖을텐데. 어쩌나....어쩌나..... 두어 해 전만 해도 띄엄띄엄 보이던 홈리스 텐트들이 요즘엔 나란히 줄맞춰 한 동네를 이룬다. 속만 상하고 안타까워 차의 속력을 내어 지나친다.
주위에 이런저런 일로 상심에 빠진 이웃들이 제법 있다. 건강이 발목 잡아 나이에 상관없이 투병 하느라 어려운 날을 보낸다. 위로 할 방법을 모른다. 내게도 어려운 일이 있어 고민하고 나름대로 고통과 부벼대는 비밀을 털어 논다. 헉, 그건 위로가 될 수 없다. 내가 정상이 아닌데 네 고통까지 들어 줄 여유가 없다며 선을 긋는다. 그렇겠다.
그럼 도대체 난 어떤 인간인가? 이렇게 남을 돕지도 못하고, 위로도 줄 수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나? 이게 뭐야? 그래서 내게 즐거움이 없구나. 행복이 가까이 오지 않는구나. 늘 가슴이 먹먹하니 터지질 않는구나. 답답해서 미칠 것 같다.
나름대로 힘차게 살며 취미가 같은 사람들끼리 동아리 되어 스키를 즐긴다. 서로에게 팁을 주며 잘 탈 수 있게 도와준다. 떼 지어 설원을 질주한다. 실력이 가장 떨어지는 내가 끝머리에 매달려 따라 간다. 와중에 스키 두 짝에 폴 2개가 흐터져 있고 10살 미만으로 보이는 꼬마가 눈밭에 두 다리 뻗고 앉아 징징댄다. 우선 폴 2개를 집어다 주니 저 멀찌기 어른이 선채로 보고 있다. 보호자로 보여 맡기고 가렸더니, 스키 실력이 아들아이 도울 수가 없단다.
우선 차분하게 꼬마에게 말한다. 두 무릎을 굽혀서 내 손 붙잡고 일어나 봐. 넌 할 수 있거든, 옳지. 내 스키로 네 스키를 받히고 있으니 스키를 신어. 그렇지. 다른 한 짝도 같은 방법으로 해. 힘을 꽉 주면서 신어. 그래. 됐네. 잘했어. 이젠 폴을 쥐고 타면서 내려가면 되잖아. 겁낼 것 하나도 없거든. 아빠도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내게 웃어준다.
물론 단박에 성공할 순 없었지만, 경사진 곳에서 벗겨진 스키를 끌어다 다시 신는 것은 어른에게도 힘들다. 자꾸 내리막으로 미끄러지니까. 돕는 사람이 얼마나 힘 있게 스키를 받혀 주느냐가 문제다. 내가 못한다. 하늘이 도우 신 거 난 안다.
오랜만에 내 가슴이 뻥 뚫리고 답답함이 사라졌다. 하늘을 안은 듯 기분이 좋다. 스키 마감시간 까지 설원을 날아 다녔다. 행복해지는 길이 이런 것인 걸 새삼 깨닫게 되니 더 행복하다. 앞으로도 누구든 이런 상황에 처한 걸 보면 내가 달려가서 도와줄게.
20200104 토 중앙일보 이 아침에 스키장에서 만난 소년으로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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