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확실하게 망가지자

2014.02.12 11:47

노기제 조회 수:402 추천:110



20140210              오늘밤 확실하게 망가지자

   극장이 있는 쇼핑 몰에서 셋이 걷는다. 부모 곁을 떠나 여행 중인 십대 아이들처럼 해방감을 만끽하며 상점 안을 기웃거린다. 스키클럽을 따라 맘모스 마운틴으로 5박 6일의 스키 여행을 온, 마지막 밤이다. 가뭄이 계속되는 탓에 적설량이 턱도 없이 부족한 상태지만 성의껏 만들어 논 눈 위에서 나흘을 즐겼다. 내일이면 각자가 속한 테두리 안으로 스르르 돌아 갈 것이다. 마치 며칠간의 달콤한 휴가를 즐긴 이등병 셋이, 소속된 군대로 반항 못하고 복귀 하듯이.

   어느 지점에선가, 익숙한 냄새가 온몸의 감각대를 휘감는다. 아, 이 냄새. 팝콘이다. 어디서 팝콘을 튀기는 걸까. 먹고 싶다. 아주 많이 먹고 싶다. 냄새에 기분이 급격하게 상승한 나의 외침에 한 발 뒤에 있던 선배가 얼른 앞장서 걷다가 찾아냈다. 극장이란다. 그런데 우린 극장으로 들어가 영화를 볼 계획은 아니지 않은가. 극장 앞으로 선배와 내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다. 말수가 적은 한선생이 경직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막으려 한다. 영화를 보러 극장으로 들어갈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극장 안에서 파는 팝콘을 살 수 있겠느냐는 당황스런 속내를 보인다.

   그 정도 장애물은 순식간에 해결하는 적극적인 성격이다 나는. 불가능하다고 미리 주저앉지 않는다. 극장 입구에서 표 받는 청년에게, 영화를 관람할 건 아니고, 팝콘을 사러 잠깐 들어가겠다고 내 의사를 전달한다. 물론 오케이다. 어렵사리 자기가 원하는 것을 허락 받은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며 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나를 선배가 뒤따르고, 한선생은 어색한 미소로 우리 둘을 보며 그 자리에 서 있다.

   솔직하게 말해서 미국생활 40년에 극장에서 파는 팝콘을 사 먹는 것이 처음이다. 건강식이 아니다.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게다가 몸에 나쁜 음료수까지? 이런 것들을 알면서도 사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내 스스로가 만든 모든 규제를 한 번 벗어나고 싶은 거다.

   팝콘도 제일 큰 것으로. 거기다 녹인 버터까지 첨가하면 말할 수 없이 짠 팝콘이 된다. 그래도 그것으로 주문하자. 음료수도 큰 사이즈로. 평상시엔 카페인이다 당도가 높다하며 멀리 하던 건강에 나쁜 먹거리들이지만 오늘은 왠지 그렇게 몸에 나쁘다는 것들을 맘껏 먹고 마시고 싶다. 빨대를 세 개 꽂는다. 작은 사이즈 세 개 값보다 아예 큰 것 하나를 셋이 나누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다. 희희락락 좋아하기에 바쁜 나를 뒤로하고, 한 발 앞서 선배가 값을 치른다.

   안 되는 게 뭐 있느냐고 의기양양해진 난, 밖에서 기다리던 한선생에게 눈 흘기곤 쇼핑 몰 안, 공용 테이블을 찾아 앉는다. 팝콘은 각자 꺼내 먹으면 된다. 그러나 드링크는 자기 빨대로 마신다 해도 빨대에 있던 부분은 뒷걸음 쳐, 다시 컵 안으로 섞인다. 아이 뭐야 이거? 자기가 마신 후 마지막 빨대에 남겨진 드링크는 혀로 빨대를 막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한 후, 빨대에 남은 드링크가 자기 입으로 흐르게 하고, 다시 빨대를 꽂고 반복하라고 가르쳤다.

    순식간에,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는 세 마리 병아리 모양새가 됐다. 그러면서 세 사람 얼굴엔 환하게 웃음이 터진다. 제법 늦은 시각이라 상점들은 거의 문을 닫은 상태다. 소리 내어 크게 웃어도 눈총 줄 사람 하나 없다. 그저 얼굴에 잔잔한 미소만 보여주며 가르쳐 준 대로 곧잘 자기 몪을 잘 마시는 한선생과는 달리, 더 신경 쓰며 조심해서 한다고는 하는데도, 음료수를 마구 섞이게 하는 깔끔하지 못한 선배. 미처 이런 불상사를 계산하지 못하고 좀 싸게 하려 한 내 불찰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깔끔 떨며 컵에 꽂힌 내 빨대를 뺄 수도 없다. 이미 우리 셋은 대 여섯 살 어린애들처럼 마구 먹고, 네입 내입에서 들락날락하는 음료수를 섞어 마시고 뭔가 공감할 수 있는 옛날 고리짝 얘기를 꺼내서 맞추어 보는 장난꾸러기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국사람들 스키클럽이 주관하는 스키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중학 일 년 선배와 그 선배의 예전 비지네스 파트너였다는 한선생이다. 따지고 보면, 남녀가 유별했던 중학교 시절엔 얼굴도 한 번 스친 적 없는, 이름만 선배다. 다른 회원들 모두 함께 저녁을 먹고, 한국인 우리 셋만 따로 맘모스 마을의 늦은 밤거리를 쏘다니고 있다.

   정월 둘째 목요일인 오늘. 크리스마스 때 꾸며진 화려한 전구들을 옷 입은 푸른 나무들이 그대로 멋을 낸 모습이다. 이런 멋진 거리에서 어느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유로운 세 영혼들이 각자의 일상을 잊고, 짧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

    희미한 첫사랑의 그림자라도 기억해서 얘기 해 보고, 결혼 전 어떻게 마누라를 꼬셨는지, 거짓말도 살짝 양념으로 섞어 잘난 척도 해 보고, 그래도 여전히 얼굴 가득 무죄한 미소만 덮고 있는 침묵의 사나이 한선생. 나도 질 새라 중학교 때 엄청 공부 잘한 척 떠들었다.

   거짓말이던 참말이던 그렇게 우리 셋은 우스워서 웃고, 따라서 웃고, 즐거워서 웃고, 팝콘이 짜다고 웃고, 음료수가 세 사람 입과 컵을 넘나든다고 찡그리며 웃고, 아직도 많이 남았다고 웃고, 손에는 버터가 범벅이라 웃고, 내일 아침은 미국 레스트랑에서 우아한 아침식사를 선배가 쏘겠다 해서 웃고, 그냥 웃고, 웃고, 웃고, 또 웃는다.

    고상하게 앉아 있을 필요 없고, 조심스레 입 가리고 웃으려 신경 쓰지 않고, 떠들며 웃느라 씹고 있던 팝콘이 튀어 나와도 상관없고, 주위에 누가 들을 새라 두리번거릴 필요 없고, 한국말로 싫건 떠들고, 파안대소하며 발까지 굴러도 마냥 즐거운 시간이다.

   어쩌면 내 평생에 처음 가져 본 시간인 듯싶다. 가끔은 이렇게 확실하게 망가지는 경험도 나쁠 건 없다고 깨닫는다. 서로 코드가 맞는 사람들끼리라면. 인생을 근엄하게만 걸어 온 듯 느껴지는 한선생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그리 재미있다고 즐거워하는 선배와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하는 말. 자신은 재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잠간 곁길로 빠져 망가져 보라고 할까 하다 그만 입 다물었다. 목사님 사위라는 입장. 근엄하게 모범을 보여야 할 장로님인 자신. 망가지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는, 나와는 코드가 다른 사람인 듯 보인다.

   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올 시간이 가깝다. 아직 팝콘도 음료수도 남았지만, 우리도 일어서야 한다. 망가지며 마음껏 느슨해 본, 일월의 어느 멋진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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