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무슨 감정인가

2012.03.20 05:40

노기제 조회 수:762 추천:148

20120313                이건 무슨 감정인가

        학교생활이 재미있다. 무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 이렇게 마음을 뿌듯 하게 하는 일인지 미처 느껴보지 못했다. 대학 2년 과정을 가르치는 city college에서 하고 싶은 과목을 선택해서 듣고 있다.
        
         결혼해서 부모님 슬하를 떠나기 전까지, 부모님이 자식들 못 알아 듣게 하시고 싶은 말은 꼭 일본말로 하셨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일본어 학원에 등록을 하고 배우러 다녔다. 일본어 배우는 일에만 매달리지 못 한 관계로 넉 달 만에 도중하차는 했지만 나름대로 부모님이 하시는 대화를 알아 듣기 시작했다. 그러자 부모님의 비밀 대화는 중국어로 바뀌고 말았다.

        그 때, 계속 부모님의 대화가 일본어로 계속 되었더라면 아마 나의 일본어 실력은 계속 늘었을 것을, 중국어로 대화를 바꾸신 부모님이, 내 일본어 교육에는 크게  실수 하신 것 같다. 그 후론 일본어가 내 생활에서 떨어져 나갔으니까.

        살아오는 동안 어쩌다 일본어를 대할 기회가 생기면 생각 없이 곧 바로 응답을 하며 엉터리 일본어를 해 오면서 신기하단 생각을 했다. 엉터리라 일컬음은, 문법, 경어, 다 무시하고 단어만 쓰면서 용케도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법이다. 나이 스물 적에 잠깐 배운 일본어로 간단하게 대화가 가능하단 사실이 내겐 기적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도 계속 배워야 겠단 생각을 하진 못했다. 별 필요성을 못 느낀 때문이다.

        그러다 아주 창피한 꼴을 당했다. 한국 방문 중에 동창들과 북한산에 갔을 때, 한 무리의 일본인 관광단을 만났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들이 단지 산행을 위해 한국을 방문 했다고 믿고 갑자기 그들을 도와야 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곤 마구 쏟아대는 일본어에 그들이 깜짝 놀라면서 어쩜 그리 일본말을 잘 하느냐고 이것 저것 묻기에 대답을 하느라고 했는데…….아뿔사, 가까이에 가이드가 있었다.

        어찌 그들이 홀로 관광 산행을 왔다고 멍청한 생각을 했을까. 관광엔 꼭 가이드가 따른다는 법령을 왜 생각 해 내지 못하고 되는 말, 안 되는 말 섞어가며 그것도 목청을 돋우며 설명이라고 해 댔으니 가이드가 다 들어버린 거다.
“그렇게 엉터리로 설명하시면 어떻해요?”
그러게 말이다. 약간 잘 안 되는 설명이라 생각은 했지만 조금이라도 그들을 돕고 싶은 마음에 그랬는데…..아하, 가이드가 함께 계셨군요.

      진짜 창피한 꼴이 됐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엎질러 진 물. 냅다 속력을 내서 그들을 앞질러 산행을 서둘렀던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 사건 이후로는 아무리 기회가 생긴다 해도 일본어를 입 밖에 내려 하지 않았다. 점점 자신도 없어지고, 과연 내가 일본어를 알기는 아는 것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도 십 수년이 지나 일 손 놓고 시간의 여유가 좀 있는 듯 싶어 일본어 회화를 등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역시 난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정식으로 공부를 했으면 좋으련만, 또 착각을 했다. 기초를 듣기엔 내가 너무 일본어를 잘 한다고 믿고 회화를 등록 했지만, 문법이 약하니 말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렇게 또 몇 년을 지내고 요즘은 2년제 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본어의 마지막 코스인 일본어 4 클래스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있다.

     대부분이 대학 적령기 학생들이다. 코흘리개 같은 어린아이들이 일본어를 배우겠다고 모인 곳이니 당연히 내 실력이 으뜸이라 짐작했다. 게다가 수강 학생들 중 한국 학생이 절반이다. 일본어 기초반 부터 차근차근 수강 해 온 아이들이니 실력이 놀랍다. 순간 위기 의식에 숨이 막혔다. 여기서도 망신 당하기 쉽상이다. 매주 월요일에 보는 시험 결과는 언제나 나를 도망가고 싶게 한다. 한자 실력도 아이들이 나 보다 월등하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언어 실습실에서 두 시간 이상이나 공부를 한다. 예습에 복습에 다리에 쥐가 날 때까지 앉아서 듣고, 또 듣고, 혼신을 다 한다. 그래도 역 부족이다. 게다가 개강한지 한 달이나 지나서 일본여자가 들어 와 함께 수업을 받는다. 교수님의 설명이 없으니 도무지 누구이며, 무었 때문에 일본여자가 일본어를 수강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여자 때문에 내 신경이 무지 날카롭게 변하고 있음이 문제다. 책을 읽어도 내가 제일 잘 읽고, 말을 해도 내 억양이 일본사람 처럼 물 흐르듯 듣기 좋다고, 지난 회화 클래스 때 교수님이 칭찬했었는데, 이젠 이 여자가 다 맡아 하고 있다. 교수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 여자 이름만 자꾸 불러서 읽히고, 대답하게 한다.

      “야, 너 뭐야? 왜 이 클래스에 앉아 있는건데? 오지 마라. 제발. 오지 마.” 항상 내 입속에서 튀어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말이다.

       오늘 수업시간에는 자기 소개를 할 수 있도록 배우는 과정에서 또 이 여자를 첫 번째로 불러서 시범을 보이게 했다. 또박 또박 듣기 좋은 목소리에 매력적인 억양으로 5,6 년 전에 미국에 왔으며 두 아이와 함께 산다고 했다.  남편은? 질문을 한 내가 오히려 민망 할 지경으로, 교수님이 허겁스레 그 여자를 대신해서 이 시간에는 사실을 말하지 않고, 꾸며서라도 자기 소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니 사실대로 말 할 필요는 없다면서, 자신을 완전 180도 다른 상황으로 소개를 해 보인다.

      뭐야 이건? 왜 내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하며 입술을 꼬옥 깨물고 싶어 질까. 그냥 입밖으로 내 보내고 싶은 말들이 갑자기 머리속을 채우는 걸까. 애가 둘 씩이나 되면서 옷차림이 그게 뭐니?  패인 가슴골이 다아 보이는 옷, 게다가 둘째 아이 난 지 몇 달 밖에 안 됐는데 남편은 없단 말이니? 너 정체가 도대체 뭐냐? 교수님은 왜 이 여자를 특별히 대우 하는 걸가?

       근데 이런 내 감정의 정체는 뭐란 말이냐.  교수님께 여러면으로 인정 받고 싶었던 희망. 일본어 실력도 클래스에서 으뜸이고 싶었던 욕심. 대학 적령기 학생들에겐 느끼지 못 했던 시기하는 마음이 이 여자에게 발동 된 숨겨 진 이유가 무엇인지, 내 마음이 알고 싶다.

       날마다 수업이 끝나면 다리에 쥐가 나도록 언어학습실에 앉아서 몇 시간씩 공부를 계속한다. 이 세상 어떤 것이라도 모두 내 것으로 만들 것 같은 자신감과 충만감이 온 몸에 흘러 넘친다. 언젠가는 내가 쓴 수필들을 일본어로 번듯하게 번역해서 교수님께 꼭 보여 드리고 싶다. 그러기까진, 내가 일등이 아닌 현 상황을 슬프지만 감수해야 한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그 일본 여자의 일본어까지 이겨 낼 수는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초조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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