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 그리고 용서의 다른점

2011.07.05 03:53

노기제 조회 수:608 추천:148

20110704
                         포기, 그리고 용서의 다른점
        억울하다. 배멀미가 심해서 크루즈여행을 포기하려 조용히 내 이름을 빼 달라 부탁하려던 것 뿐이다.

        고교졸업 45년째 되던 2010년 꼭두새벽 부터 한국에 있는 동창들과 미국에 있는 동창들간에 여행 계획이 오고 가고 동기 웹사이트가 부산 해 졌다. 알라스카 크루즈를 시작해서 한창 계획이 익어 갈 무렵, 가격이 아주 저렴하게 멕시코 크루즈가 새 상품으로 나왔단다. 갑자기 행선지를 바꾸자는 의견이 나오고, 희망자를 접수하며 호떡집 불난듯이 순식간에 새 여행지가 결정 되고, 한국에서 오는 70여명 동기들이 발 빠르게 여권갱신에, 비자 발급에, 여행 신청금이 은행에 속속 입금 되고 있을즈음 가까이 사는 친구가 여행 예정자 명단에 없는 것을 발견 했다.

        여행을 종용 해 볼 요량으로 전화를 걸고 한 참 설득 작전을 펴려는데, 이 친구 배멀미가 심해서 크루즈는 싫다고 한다. 아차, 나두 그런데. 어쩌나? 몇 해 전 3박 4일 멕시코 크루즈 때, 그 기분 나쁘고 얄미웠던 기억이 떠 올랐다. 구토를 할 것이면 확실하게 구토를 하던지, 심하게 메슥거리기만 했지, 확 터져 나오지도 않고, 빙빙 도는 침대에 누워 잘 수도 없었고, 내 생에 다시는 크루즈 여행 안 할거라고 다짐하며 억지로 참았던 생각하기도 싫었던 기억을 5 년이 지난 후, 아주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다.

        그런 어려움 감수하면서 까지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동기 사이트에 올라 왔던 여행사를 찾아 전화를 했다. 마침 담당자 마이클이란 청년이 친절하게 도와 주겠다고 하면서 사실은요….제가 이러이러한 일을 당해서 제 손을 떠나 있어요. 지금 해약 하시면, 딴 사람이 대체 하면 25불 벌금 내고, 대신 갈 사람 없으면 고스란히 손해 보셔야 될거란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하고 싶다고 이멜 주소를 달라기에 별 생각 없이 줬다. 크루즈여행이란 것이 미국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가이드가 필요 없는 여행이라 생각한다. 물어 보고, 스케줄 읽어 보고, 자기 하고 싶은 것 찾아 다니며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배가 정박하는 곳에 따라 관광을 하고 싶으면 내려서 하고, 알아서 볼 것 보고, 먹을 것 먹고, 뭐 어려울 건 없다.

        그러나 의사 소통이 곤란한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에겐 누군가 진두지휘를 해 줘야 편하게 즐길 수 있다고 생각 한다. 처음 크루즈 여행이 결정 되고 가격 흥정에서 비자 문제, 여권 문제, 뭐 필요한 일이 한 두가지 였겠나. 더구나 한국, 미국 통 털어 100 여명이 되는 젊은 할머니들이, 가이드없이 몰려 다닌다는건 좀 어렵겠다. 일을 추진하던 우리 운영팀이 마이클에게 의탁 해서, 여행 계획이 진행 되다가 막바지에 연락을 끊었다는 얘기다.

        여행비를 깍고 깍고, 급기야는 큰 단체를 많이 취급하는 코스트코 가격까지 들먹이며 깍았던 모양이다. 결국 마이클이 원한 건 가이드 팁만 달라고 다 양보를 했는데, 그것도 100 여명이 7박 8일 팁이면 8천여불이다.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금액이니, 마이클 측에선 여행 주선하고 남기는 금액을 다 포기 해도 하고 싶은 일이었을게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우린 말이 통하니까 가이드가 필요 없다며 돌아섰다는 얘기다. 내 입장에선 빨리 여행을 취소 하고 여행비를 돌려 받아야 하는데 엉뚱하게 끼어 들게 된 셈이다. 우선 뭔가 서운한 것이 있는 모양인데 아들뻘 되는 사람에게 그리 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를 할테니 마음 부터 풀고, 잃은 비지네스는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길 기도하겠노라 했다.

        벌써 하나님께서 채워 주셔서 더 큰 의뢰가 들어 와서, 지금 자기더러 해 달라고 해도 할 수가 없단다. 그러나 100 여명 되시는 어머님들이 가이드 없이 크루즈 여행을 하신다는 게 자기로서는 용납이 안 된다는 말이다. 경험 있는 가이드도 혼자는 감당 못할 숫자여서, 적어도 두 사람의 전문 가이드가 동행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마음 아파서 분이 섞인 하소연이 아닌, 염려 섞인 경험자의 설명이니 나도 흔쾌히 접수하고, 동기 운영팀에 마이클 의견을 전달 했다.

        느닷없이 왜 마이클에게 전화를 했느냐고 호통이다. 운영자중 한 동기의 아들이 너무 많이 애를 써서 가격도 낮추고, 가이드도 담당한단다. 그렇게들 한다고 마이클에게 역전달하며 걱정 말라고 했다.

        문제는 거기서 부터 시작 했다. 마이클이 그 운영자에게 이멜로 따지기 시작하면서 미국 서부 주최팀 세 명, 동부 대표 한 명, 한국 대표 한 명, 그리고 내 이멜 주소가 적힌 채 수차례 대화가 오고가며 그동안의 사실이 낱낱이 이해 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오가는 멜을 여섯 사람이 다 보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분노가 치 솟은 마이클이 아무리 돈이 좋지만 경험도 없는 아드님을 가이드로 쓰신다니 인격이 보인다고, 왜 묻는 말에는 사실대로 대답을 못하느냐, 자꾸 딴 소리만 하면서 딴청을 피운다고 공격을 하니, 우리 동기왈, 결국 이 모든 일이 애써 일하는 사람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하는 웃으운 사람 하나 때문이라고 비난을 한다. 어?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렇게 뒤집어 쓴 오물을 벗을 도리가 없었다. 마이클이 해명을 하면서 엄한 사람 잡지 말고 대답이나 똑바로 하라고 해도 핵심을 피하면서 자기만 혼자 애쓰고, 자기 아들이 완전한 영어로 어려운 일 다 해결 했고, 크루즈 여행을 열 번 넘게 해서 충분하게 가이드 일을 할 수 있다는 해명을 동기들에게 했다는 후문이다. 젊은 애가 웬 크루즈를 그리 많이 다녔을까.

         결국 대타가 생겨 25불 벌금만 물고 참여는 안 했지만 씁쓸한 기억이다. 내가 변명을 한다고 해도 들어 줄 사람 없었고, 한국에서 여행오는 동기들은 큰 여행 앞두고 가뜩이나 불안한 데, 무슨 이런 변 저런 변 다 듣고 판단을 할 것인가. 무조건 운영팀 손을 들어 준다.

         그 후로 동기 웹사이트엔 발을 끊었다. 이 꼴, 저 꼴 다 보기 싫어서다. 두 달에 한 번 있는 동기 모임에도 일절 참여를 안 한다. 또 다시 그런 꼴 당하기 싫으니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일 그만 두면서 집으로 옮긴 사무실 책상을 구세군에 보내려 정리 하는데 고운 카드 한 장 눈에 띈다. 졸업 35주년 때 미국 동기들이 힘써 주최했던 리유니온 파티가 끝나고 동기가 보내 준 카드다. 주최 모금에 막차로 적지 않은 금액 성원 해 줘서 고맙다는 예쁜 문구와 그 동기의 이름이 있다.

         순간, 내가 잊고 있었나? 아직도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있는 줄 알았는데 마음이 온화하니 그 친구 얼굴이 떠 오른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인생인데 뭐 그리 서둘러 연을 끊고 살려 했나. 35주년 때도, 45주년 때도 귀찮은 일 맡은 운영팀으로 앞장 서서 애 쓴 친구였구나. 그래, 내가 감당하자. 분해서 억울해서 깡그리 잊고 빼 버리고 살았는데, 온전히 따스한 용서가 내 온몸을 흐른다. 일 년 반 걸려 마음이 따스하니 변했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하늘이 하신 일이다. 억지 쓰며 고집 부리지 말고 고스란히 맡기고 편해지자. 편해진다. 편하다. 이젠 전화라도 한 번 걸어 볼 수 있겠다. 잘 지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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