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맛 본 이런 희열

2009.05.21 02:35

노기제 조회 수:627 추천:144

20090618                        처음 맛본 이런 희열
        나를 위해서가 아닌, 교수님을 위해서란 명분 아래 평소에 하기 싫어 피해오던 연주회에 참여키로 했다. 내가 다니는 여기 로스앤젤레스 시티 칼리지에서는 악기를 배우는 클래스나 성악을 공부하는 클래스는 학기를 마치며 발표회를 한다. 공부 할 시기에 맞는 나이의 음악도들은 UC계열 대학으로 transfer 하기 위해서도 발표회 때 연주 하는 것은 필수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도 꼭  연주에 참여 한다. 그러나 난 단순 취미 생활 정도의 수준인 학생이니 연주회에 참여하기엔 적합치 않다고 스스로 피해 오던 터다.
    
     취미 생활중 한 가지로 기타 클래스를 등록 했다. 원하는 대로, 내가 치는 기타 반주에 맞춰 노래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남이 치는 것을 보았을 땐, 그리도 쉬워 보이더니. 막상 기타 몸통을 끌어 안고 여섯줄을 편애 없이 사랑하려 노력 했는 데, 재주가 부족했던 탓인가. 쉽게 목표를 이룰 수가 없었다.

    쉽사리 재능 한가지 늘려 보려 시작했던 건 결혼도 하기 전 까마득히 옛날이다. 광화문 어딘가 학원에 첫 등록을 한 후,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경력이 있다. 10년 쯤 지난 후, 결혼하고 미국까지 와서 다시 시작 해 보려, 직장  다니며 밤 클래스에 등록하고 애를 쓰다 또 포기 했다. 하고자 하는 마음에 따라주지 않는 연습. 시간도 부족하지만 우선은 너무 어렵다. 안 된다. 손가락이 짧아서라고 불평을 한다. 손가락 사이가 필요 한 만큼 벌려지지도 않는다며 또 포기를 했다. 그리고 바쁜 십여 년을 보낸 후 다시 등록을 했었다. 역시 계속 하지 못하고 말았다. 또 다른 십 이삼년을 지내고 나니 이젠 일에서 손 떼고 시간은 넉넉한 학생이 되어 시작한 기타.

     간격이 보통 십년 이상이고 보니 세 번째 포기 했을 땐 이젠 기타와의사랑은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대도 미련이 남아 일년 반 만에 다시 등록하고 학기말 연주회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도 없고, 청중 앞에서 연주라니….,실력이 뻔하니 연주회 참여는 사양하고 지냈다. 그러나 이번엔 무슨 맘이 들었나. 여러해 기타를 전공한 학생들로 구성 된 앙상불 클래스(합주반)  학생들의 독주 외엔 솔로 연주자가 없다고 난감 해 하시는 교수님 말씀에 선듯 자원을 했다.

     내가 무슨 일을 벌리는 건가. 연주라니. 교인들 앞에서 찬송가 한 곡 부르는대도 숨이 막힐 듯 벌벌 떠는 주제에 교회 보다 훨씬 넓은 대학 강당에서 그것도 완전하게 외워서 칠 수 있는 곡 하나, 준비도 안돼 있으면서 무슨 연주를 하겠다고 나섰나. 연주 할 학생이 없다고 난감 해 하시는 교수님 표정에 순식간에 도와 드리겠다고 인심을 쓴 것까진 좋았는데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18년 전, 1991년 클래스에서 학기 말 시험으로 쳤던 곡을 틈틈이 연습은 했었지만, 그 틈틈이란 수 년에 몇 번 정도다. 외워지지도 않고, 악보에서 눈을 떼면 그 순간 하얗게 머리 속이 아뜩해 지는 상태다.  2주 동안 날마다 연습이다, 제법 된다. 악보도 외웠다. 남편의 반응이 경이롭다는 표정이다. 된다. 할 수 있다. 며칠 동안은 하루 종일 연습 했다. 연주 당일에도 일찍 가서 내 차례가 되기까지 몇 시간을 그 한 곡만을 치고 또 치고 또 쳤다. 떨리는 가슴이야 무슨 도리가 없으니 그냥 떨리는 대로 떨기로 마음 먹었다. 악보를 다 외웠는대도 자꾸 자신이 없다. 중간 중간 깡그리 잊어버린다. 어디서 다시 시작을 해야 할지도 생각이 안 난다. 할 수 없다. 잊으면 잊은대로 하리라. 그래도 교수님을 도와드린다는 생각 하나에 마냥 기쁘기만 하다.

     “기제, 너 잘 할 수 있어. 아주 잘 하니까 걱정 말구. 정말 잘 할 수 있다니까. 기타 이리 줘 봐. 내가 튜닝 해 줄께. 됐어. 심 호흡 한 번 하구. 됐어. 다음이 네 차례니까. 괜찮아. 평상시대로 하면 돼. 아주 잘하니까.”

     내가 보기엔 교수님이 더 떨고 있다. 발갛게 상기 된 얼굴이며 말이 많아 진 것을 보니 무척 걱정이신 모양이다. 가엽다. 교수님이 불쌍하다. 직장에서 해야 할 자신의 의무에 최선을 다 하지만, 뭔가 부족해서 쩔쩔매는 상황인 듯 보여서 안스럽다. 학생이 연주를 잘 해야 하는 건 아닐꺼다. 발표 할 충분한 학생 수에, 그 동안 가르친 결과를 학생들이 연주로 증명 해 주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무대로 나가려니 교수님이 직접 내게 맞춘 foot step(왼 발 올려 놓는)을 들고 나가신다. 가슴이 찡하니 감사한 마음에 화안히 웃으며 기타를 들고 대기실을 나간다. 청중을 향해 밝게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내가 나를 느낀다. 그래. 잘 할 수 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인데 연습 잘 되던 때 처럼 잘 할꺼다. 마음을 평안히 갖자. 여긴 내 방이고 나 혼자 연습하려고 무대에 앉을 뿐이다.

     나를 위해서 나선 것이 아니다. 나를 보이려고, 나 잘났다고, 뽐내려 나온 것이 아니지 않는가. 난 그저 교수님이 안전한 위치를 확보하고 계시는 데 일조하려는 것이니 잘 될꺼다. 가뜩이나 줄어드는 학생 수. 이러다간 기타클래스 자체가 없어 질 수도 있다. 등록은 했어도 나처럼 계속하는 것이 힘겨워 도중하차하는 학생들이 반은 되는 성 싶다. 학기 초엔 교실이 꽉 차 보였는데 학기말엔 금방 눈으로 학생 숫자가 파악된다. 그러니 내 작은 힘을 보태자. 실력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주회 의상을 고르고, 화장을 예쁘게 하고, 머리손질은 가발로 대치한다. 성의를 보이면 기타클래스의 인상이 좋을 것이다. 연주회에 온 청중들이 혹시라도 매력을 느껴 다음 학기엔 기타 클래스에 많이 등록을 하고 싶도록 보여지고 싶다.
     교수님을 위해서. 이렇게 기특한 생각으로 떨리는 가슴 진정하며 애쓴 보람이 내게 큰 상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기쁨이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듯한 이 희열. 내가 청중들 앞에서 기타 독주를 하다니. 우하하하 노기제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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