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만 주렴

2009.06.24 00:46

노기제 조회 수:744 추천:126

20090621       살아만 주렴
        
        코요테를 공격하고, 순식간에 물려 간 윈디. 아빠가 곁에 있으니 설마 너희들 코요테가 나를 어쩌랴. 울 아빤 수퍼맨. 너희들 다 이길 수 있어. 윈디의 그 믿음에 부응해 짐승들만이 오가는 가파른 비탈 산속에 죽어 있는 윈디를 초인적 힘을 내어 찾아 안고 돌아온 남편. 땀에, 눈물에, 피투성이….몰골이 말이 아니다.
        
     응급실로 들어서니 먼저 와서 기다리던 강아지 주인이 우리에게 순서를 양보 한다. 지들끼리 싸우다 귀를 물려 잘려 나갔단다. 우리 윈디를 보더니 살아 있느냐며 걱정을 한다. 재빨리 윈디를 안고 들어간 간호사가 우선 응급조치를 했으니 의사가 올때까지 기다리란다. 벌겋게 핏물이 밴 남편의 셔츠가 눈에 들어 온다.
        
     다행히 깊이 물리진 않았지만, 몸 전체가 잇빨 자욱에 핏 자욱이고 너무 놀라 혼절한 상태가 오래갈거란다. 온 몸을 소독하고 몇 군데 찢긴 곳은 꿰메고 왼쪽 넙적다리는 너덜너덜 떨어지기 직전이다. 그래도 생명엔 지장이 없단다. 그제야 남편의 경직됐던 얼굴이 풀리고 있다. 병원에 두고 집으로 일단 돌아 가서 경과를 지켜 보자는 의사가 마치 천사처럼 보인다.
        
     내 핏줄이 아닌 단순히 개. 애완용 개일 뿐이란 생각이 안 든다. 내 핏줄 같다. 얼마나 놀랐을까.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무서울까. 아빠 엄마를 찾을 텐데. 병원에서 어찌 견딜까. 그날 밤, 의사에게 간청해서 면회를 허락  받고 가보니, 링거를 꽂고 죽은 듯이 누워 있다.
        
     그냥 울어 버렸다. 윈디야 부르니 눈을 스르르 뜬다. 다시 윈디야 부르니 몸을 일으킨다. 손을 넣어 만져 주니 엄마인 걸 알아차리곤 막무가내 케이지에서 나오겠단다. 윈디야, 기운내서 살아야 돼. 오늘은 여기서 주사 맞고 자구 내일 아침에 엄마가 데릴러 올께. 이쁜이 윈디, 착하지. 힘내자 윈디. 꼭 이겨내자 윈디야.
        
     응급실은 다른 병원들이 닫는 시간에만 여는 병원이다. 퇴원 후, 평상시 다니던 의사에게 데려 가란다. 월요일 아침 8시에 퇴원 수속을 하고 한국인 수의사에게 데려 가니 8시면 출근해야 할 의사가 9시가 넘어서야 나타났다. 자초지종을 듣더니 자신이 없는 표정으로 우리 윈디를 본다. 자기넨 저녁이면 닫으니까 큰 병원에 데려가 입원을 시키란다.
        큰 병원 주소를 들고 두시간 넘게 헤메다가 찾아 들어가니 축 늘어진 윈디를 받아 데려가선 감감무소식이다. 한참 후, 어느 방으로 안내 되어 들어 갔다. 또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들려오는 소린 바로 인턴들 공부하는 소리다.

     눈에 상처가 생긴 건, 심각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단다. 찢긴 넙적다리에선 말간 물이 계속 나오는데 뭔지 잘 모르겠다는. 그러고 보니 우리 윈디를 눕혀 놓고 초짜 의사들 연구시간인 모양이다. 울컥 화가 치민다. 밖에서 기다리게 할 땐 치료해야 할 항목들에 가격표를 작성해서 읽고 싸인하라더니. 이젠 우리 윈디를 실험대상으로  공부들 시키고 있다. 그렇게 들리는 소리에 부글부글 속을 끓이고 있는데 노란머리 파란 눈의  젊은 여자가 흰 가운에 환한 미소로 들어선다. 닥터 뭐뭐라고 자기 소개를 하는데, 절대 의사가 아닐꺼다. 아직 졸업도 안 한 학생 인턴이나 되겠지.
        
     편치 않은 음성으로 지금 우리 개 놓고 뭣들 하느냐 따져 물으니, 자세히 진단을 해야 올바른 치료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상냥하게 웃는다. 속수무책. 당장 윈디를 데리고 나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저 윈디에게 미안한 마음 뿐. 달리 방법이 없으니 참고 기다려야 한다. 아침 8시에 링거를 빼고, 이 병원 저 병원 헤메다 12시가 넘은 시간까지 저렇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으니, 응급실에서 살려낸 애 죽일것만 같아 두렵다.
        
     하나님 살려만 주세요. 윈디야 살아만 다오. 엄마가 미안해. 응급실  보다 3배나 비싼 치료예정 가격에 카드를 긁고 싸인을 해 줬으니, 빨리 치료에 들어가야지, 아픈 윈디를 놓고 이러니 저러니 연구 발언들만 하고 있으니 저것들을 그냥 콱 고발 해버려?  화가 치민다..

     얼마나 지났을까. 돈 미리 다 받고는 나보구 가란다.  얼마가 들던, 치료에 동의한다는 싸인도 했다. 돈 드는 건 이차적 문제다.  우리 윈디가 얼마나 시달려야 할런지. 싸울 수도, 포기하고 돌아 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그래도 애는 살려야 하니 맡기고 돌아설밖에.
        
     깜찍하다. 금발에 파란눈, 수의사라는 허울. 그 속엔 온통 돈,돈,돈, 돈을 향한 욕망만이 꽉 들어 찬 느낌만 풍긴다. 명세서를 보면 금방 알겠다. 양심이 있는가?  이게 이바닥 실정인가. 그 병원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이 노인들이다. 애완 동물에 의지해서 남은 인생을 많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들이다. “따님이 오늘은 아주 잘 걷네요. 많이 회복 된 듯 합니다.” 남자 수의사의 목소리다. 어떤 할머니가 데려온 커다란 개를 가리키는 소름 돋는 아부성 발언이다. 물론 나도 우리딸 윈디, 엄마, 아빠, 란 호칭을 쓰지만, 수의사들 스스로가 저런 호칭을 먼저 쓰는건 어쩐지 부자연스럽다. 하룻밤 재우며 뭘 특별히 한 것도 없구, 이약 저약, 약값에다 너무 엄청난 치료비를 청구함에 심통이 나버린 뒤틀린 내 심사인가.
        
     아무 불평도 없이, 그저 추욱 처진채 나를 반기는 윈디를 퇴원시키며 돈 문제로 왈가왈부 하기가 싫어진다. 그래. 주자. 윈디만 무사히 회복 될 수 있다면 뭔들 못 주겠냐. 품에 안은 윈디가 따뜻하다. 집에 데려와 자리를 마련해 주니 꼼짝을 못하고 누워만 있다. 먹는게 없으니 소변만 줄줄이다. 시간 맞춰 약 먹이고, 기저귀 갈아 주고, 찢긴 넙적다리엔 아직도 말간 물이 고인다. 봉합 수술은 내가 동의 하지 않았다. 물이 마르길 기다려야 할 것 아닌가.

        응급실에서의 그 수수한 의사에게 연락해서 어디로 가야 계속 당신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가 물었다. 자기가 출근하는 병원은 너무 멀리 있으니 우리집 가까이에 있는 L 병원에 가서 닥터 챙을 찾으란다. 잘 봐줄거라고.

        집에서 일마일 거리다.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친절하다. 특히 우리 윈디를 아주 용감한 개라고 예뻐 해준다. 감히 코요테에게 덤비다니. 대단하단다.
무엇보다 치료하는 닥터가 믿음이 간다. 차근차근 설명도 해주며 금간 갈빗뼈는 달리 손 쓸 수 없으니 조심하란다. 자연히 붙어야 하니까. 돈 들 일은 두고 보자며 미룬다. 가능하면 적정한 가격으로 청구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고맙다.

        입맛이 돌아 올 동안은 닭죽을 끓여 주며 기운을 차리게 했다. 죽을 먹으니 큰 일도 보게 되니까 비실비실 일어나 걸으려 애를 쓴다. 걷지 못할 줄 알았는데. 헛 디디며 힘 못 받으며 걸으려는 모양새만이라도 신기하고 감사하다. 그냥 기저귀에 싸면 될걸. 굳이 밖에 나가서 볼일을 보겠다고 고집이다.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문앞으로 가서 비틀대며 서서 기다린다. 의견이 멀쩡하니 사람과 똑같다. 안아서 잔디에 놓아 주면 픽픽 쓰러지며 볼일을 본다.

        출근 하는 남편 시중 들곤 하루종일 윈디 곁에서 지낸다. 내 일상은 접었다. 학교도 중단이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이어질런지 모른다. 그래도 행복하다. 살아난 윈디가 눈을 맞추고, 정성껏 끓여주는 죽을 먹으며, 혼자 힘으로 볼일을 보겠다고 고집 부리며 뒤뚱대는 모습이 너무 고맙다.

        이런 모양으로라도 살아 준 것이 감사하다. 언제까지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다 해주리라. 윈디가 있음으로 내가 느끼는 이 행복함을 어디에서 대신 얻을 수 있겠는가. 병원에서도 윈디의 회복이 아주 빠르다고 기뻐해준다.

        사람도 사람나름, 수의사도 수의사 나름, 병원도 병원나름, 다 다르다. 어떤 한 가지 내가 원하는 원칙을 세워 놓고 다 그 범주 안에서 그래야 될 것 아니냐고 따지려 들면 나만 고통 스럽다. 시야를 넓히자. 마음문을 활짝 열어 놓자. 각양각색 다른 마음들을 모두 품어 보자.  윈디를 다시 내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무언들 못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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