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샷 하던 그날밤

2009.09.20 03:40

노기제 조회 수:783 추천:150

20090920                원샷 하던 그날 밤

        남녀공학, 실은 남녀병학이 맞는 말 아닌가 싶다. 우린 분명 함께 공부 했지만 남녀가 같은 반에서 공부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 엉거주춤한 사이인 졸업생들이 졸업 연도의 숫자가 올라갈 수록 막역한 사이가 된다.

        이번 17회 졸업생 51명과 두 분의 어부인이 함께 한 캐나다 6박 7일간의 여행중 발견한 사실 하나. 아직도 얼굴 붉히며 수줍어 표현하지 못하는 관심 있는 여학생, 흠모하는 남학생, 이런 현상이 남아 있음에 적잖게 피해를 본 내 가슴.

        두고 온 가족들, 세상 사 모두 잊은 양, 물 만난 고기들 인 듯, 생생한 표정들, 까르르 까르르 사춘기 아이들 처럼 배꼽을 쥐고 웃는 환갑을 훌쩍 넘긴 우리들. 그런중에도 더러는 마음 다치는 일이 생긴다.

        여행 넷째날 밤이다. 호텔 회의실을 빌려 다 함께 모여 각자 자기 소개하는 시간을 가진 후, 밤 10시가 통금인 호텔. 아쉬운 마음들 접고 goodnight. 공식적인 모임은 끝나고 자유시간. 들리는 소문에 아래층 bar에서 모임이 있으니 원하면 참석하란다.

        그렇찮아도 벤프에서 묵던 날 밤의 자유시간, 짐정리 하는 일로 허투로 버린 시간을 후회 하던 터.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참석하자고 룸메이트와 의견을 같이 했다.

        우리가 합석 했을 땐, 이미 전작으로 거나해진 친구들. 세 명의 외국인 손님이 조용히 한 잔 기우리고 있을 뿐. 열 두세명의 우리 테이블은 완전 전세 낸 손님들이다. 너무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니 손님들과 웨이터. 즐거운 모습들 보기 좋다고 자기들도 즐긴다나. 다행이다.

        약혼식이나 결혼식에서 보았던 남녀가 팔을 어긋 감싸며 술잔을 들고 한 숨에 다 마시자는 원 샷. 오늘 따라, 여행에 동반한 부인은 안 보이고 혼자 나타난 중건이 향응을 주도한다. 다들 부담 없이 그들의 대화에 웃고, 그들의 몸짓에 즐겁게 떠들며 쿵짝을 맞춰 준다.

        근래 알콜을 똑 소리 나게 끊은 홍식. 평생 알콜은 입에 안 대는 나, 그리고 무슨 이윤지 경개도 합류, 우리 셋은 물잔을 앞에 놓고 ‘위하여’를 함께 외치며 분위기를 맞춘다.

        한국의 동기 회장 길승이 나타나서 거의 바닥 난 피쳐(pitcher)를 보더니 얼른 두 개 새로 공급한다. 그리고 누군가와 예의 원 샷!  그 때 와인 한 잔 손에 들고 우아하게 나타난 준옥. 원 샷? 이제 우리 나이 그 정돈 해도 되겠지 혼잣말 처럼 자신에게 허락을 하고 기꺼이 참여 할 자세.

        물잔을 앞에 두고 분위기만 맞추던 두 남자.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서며 “나도 원 샷 할꺼야.” 경개가 멀리 있는 피쳐 끌어다 한 잔 가득 따른다. 자신의 키를 감안 해서 꼬맹이 여학생들만 집중적으로 연구 했다던 경개. 공부는 60점을 목표로 삼았더니 시간이 있었단다. 혹시나 내 여자 될 성 부른 여학생 있을가 하고. 지금 경개를 벌떡 일어 서게 한 여학생이 그 중 하나 였나?

      그러나 꼭지가 이미 돌아간 희림이 착각하며 하는 스피치.
“왕경개가 이희림이를 기억한다 이거야. 나 기분 무지 좋다 이거야. 자아, 우리 원샷.” 순간 오랜 소원 한 번 풀어 보려던 경개, 잘 못 잡혀 버렸다. 그러는 사이 홍식인 두 손에 찰찰 넘치는 피쳐를 들고 온다.

        자정까지만 허락을 받은 모임이 자정을 이미 지났으니 파장해야 한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그만 밖에서 샜다. 무의식중에 “이제 그만 끝내지. 시간이 지났는데.” 혼잣말 처럼 낮게 새버린 말을 홍식이 들었다. “술 안 마시려면 가면 되잖아. 싫으면 가면 되지. 가라구.”

        역시 홍식을 벌떡 일어 서게 한, 파장에 나타난 여학생이 어쩌면 평생 흠모하던 여학생이었을 수도 있다. 물잔으로 기분 내다 바닥나는 술병을 채우면서 까지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려 했던 깊은 맘을 내가 알아 채지 못한 것이다. 흔쾌히 허락 한 준옥과 원 샷을 하는 그 up된 표정. 기다리고 기다린 황금 같은 순간을 포착하려는 찰라, 자칫 와르르 무너질 위기감을 조성하는 내 한 마디가 얼마나 얄미웠을가.

        나이가 환갑을 넘겼으니 어떻다는 건가. 불변의 법칙이다. 여자는 꼬부랑 할머니가 돼도 여자. 남자는 죽어도 남자. 졸업 후, 소식 모르게 헤어져 살아 온 세월은 아무 역활도 못 한다. 그 세월들 훌쩍 뛰어 넘어 고교 졸업하던 그 때로 완전 복귀한다. 그래서 말 한마디 못 건네고 했던 가슴앓이도 이 기회에 화악 풀어 버린다. 원 샷 하던 그날 밤, 난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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