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2010.05.26 09:52

노기제 조회 수:721 추천:145

20100507

        “사모님 이세요?”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한 마디 하면 언제나 돌아 오던 소리였습니다.  엄마가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한 마디 하면 “미스 박야?”  한 번도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없던 기억입니다. 목소리 뿐 아니라 어쩜 그리 똑 닮았느냐는 감탄의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물론 엄마는 “아무렴 내가 쟤 처럼 못 생겼을라구요.” 라며  사람들을 웃기곤 하셨죠.
        
        천성이 밝고 맑은 엄마의 성격 탓에, 순탄치 않았던 엄마의 삶도, 제 빛을 잃고 밝은 색을 덧칠하고 살았습니다. 명성있고 멋진 남자와 사는 이유로 길게 줄 섰던 다른 여자들과 나눠야 했던 남편. 분명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을겝니다. 그럼에도 내게 비친 엄마는 슬퍼하거나 비관하는 표정 한 조각 없는 항상 미소가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저런 아빠하고 살지 말고 딴데로 시집가라고. 그랬더니 엉뚱하게 나를 끌어 넣더라구요. “다 너 하나 때문에 참고 사는 거야. 사내녀석들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기집애인 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거지.” 공연히 내 핑계 대면서 심한 시어머니 시집살이까지 하며 사는 엄마의 인생이 내겐 정말 한심 해 보였더랬습니다.

        결혼해서 살다보니 무슨 뜻인지 이젠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세상이 많이 변해서 이혼 한 가정이 태반이지만, 내가 결혼 한 1972년도, 그때 만 해도 결손가정의 딸래미는 열악한 조건의 신부감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찌 어찌해서 연애 결혼을 한다 해도, 시집 식구들에게 눈총 받기 쉽상인 배경임에, 고개 숙이고 기죽어 살 뻔 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엄마의 희생에 절절이 감사하던 순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부부싸움을 했을 때나, 시누님께 마뜩찮은 빌미를 잡혔을 때나, 만약 그런 순간에 울엄마가 이혼을 하고 결손 가정에서 자라서 시집을 왔다면, 당연히 몇 마디 듣기 거북한 소리를 들을 뻔 했음을 기억합니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이 두 대통령들의 뒤에는 나 처럼 바람직하지 않은 아버지를 두었지만,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지극정성으로 길러 준 어머니가 있었답니다.

        엄마와 나는 띠 동갑,  24살에 나를 막내로 낳았으니 엄마도 철부지 였을 터. 죽자살자 지겹게 쫓아 다녀서 아빠랑 살기는 했지만 딱 일주일 후 부터 바람피기 시작한 아빠를 여자로서 시샘하는 걸 포기하고 살았다는 엄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엄만 내게 꼭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을 하라고 했습니다. 조건은 아무것도 따지지 말라 했습니다. 돈은 언제나 돌고 도는 것이니 상관 말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난 바보라고 생각했습니다. 돈도 있어야지, 없이 사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 지 몰라서 저러나 싶었습니다. 오빠 둘, 나까지 세 아이 학비 낼 때 되면 외삼촌네로 이모네로 돌아 다니던 엄마. 끼니꺼리마저 번번히 종종걸음 치며 친정 형제들에게 손 내밀던 엄마가, 나더러 돈 없는 신랑감이라도 네가 좋으면 된다는 말을 그리 쉽게 하더란 말입니다. 허기사 나 태어나기 전, 중국 상해에선 남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살기도 했으니 엄마 말이 틀린 말은 아니란 걸 짐작 할 수는 있습니다.

        집안 살림은 나 몰라라 밖에서만 인심 후한 한량이던 울아버지. 싹이 노라면 애저녁에 파토를 낼 일이지 어쩌자고 엄마는 일생을 아빠 곁에서 살았을까. 그것도 역시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어린 소견이었죠. 지금이야, 엄마가 그렇게 참고 견뎌 준 결과를 내 삶의 모양새에서 발견하며 감사함을 거듭 하늘에 전하고 있답니다.

        엄마의 그 은혜에 보답하는 딸래미로 살 수 있었던 내 삶. 무슨 수로 그런 큰 빚을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만 하늘이 도우셨습니다. 딸 덕에 미국까지 와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게 된 울엄만 평생을 딸 딸 하며 살다 가시라는 오빠들의 질투 넘친 말을 그대로 이루었습니다.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던 울엄만, 딸래미가 사는 미국에 와서 딸이 믿는 예수님 소개 받고 예수님을 남편 삼아 행복한 생활을 맛 보았습니다. 인간 남편에게서 평생 못 받은 사랑을 예수님에게서 흠뻑 받고, 침례로 예수님께 화답하던 1980년 5월. 침례를 집례하신 김동기 목사님 말씀이 우리 교회에서 최초의 선교사를 배출했다 하셨습니다. 침례 받은 엄마를 남편과 아들이 있는 한국으로 파송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의 달콤한 신혼 시절이던, 1982년 12월 30일, 딸래미가 드리는 마지막 기도에 아멘으로 동의하고 잠드셨습니다. 이렇게 엄마 생각을 하면 누구도 줄 수 없는, 뜨거운 예수님 사랑 때문에, 하늘의 평화로 가득 차 오릅니다. 포천에 자리한 재림교인 묘원에 잠든 울엄마. 부활의 날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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