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으로 이끌던 권투위원회

2005.05.08 0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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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504                        집념으로 이끌던 권투위원회

                                                                                노 기제

        아버지의 눈매는 날카로운 편이다. 세상에서 딸 아이를 가장 무서워 한 우리 아버지. 아버지에게 유일한 딸 아이였던 난 그 매서운 아버지의 눈매를 사랑했다. 한 때 아버지가 키우던 매의, 작지만 확고함으로 투명했던 눈과 닮은 눈매다. 그 매를 부르려 넉넉잖은 살림에 소고기를 다지던 아버지의 모습에서 어릴 적 난 아버지의 집념을 읽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놓으면서 지키고 이끌던 아버지의 분신인 권투위원회.
        아버지가 권투를 시작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또 왜 권투를 했을까. 계집애인 내게는 별로 해당이 안되던 질문들이다. 당연히 난 아는 바가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엄마가 들려 준 짧은 얘기다. 그리고 그 얘기를 뒷 받침할 사진 몇 장이다. 중국 샹하이에서 라이트 급 동양 챔피온까지 올랐던 날렵하고 핸섬한 멋진 남자. 28세에 은퇴를 했고, 그 이후 서울에서 권투위원회를 조직하고,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몽땅 털어 맥락을 이어가던 고집스런 인생 역경 뿐이다.
        내가 기억해 낼 수 있는 시기로 거슬러 가 보면 역시 권투위원회로 인해 우리 삼남매 학비나 식구들의 끼니가 고스란히 희생되던 아픈 생활들이다. 누가 그런 아버지를 이해 했을까. 집안에 소홀하고, 식구들에게 소홀하고, 그러면서도 권투를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집안에 들여다 숙식을 시킨다. 물론 끼니가 넉넉한 생활이 아니었으니 권투 선수들을 잘 길러 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사나이 한 번 태어나서 혼신을 다해 어떤 일을 일구어 낸다는 것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아버지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내 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것은 아버지를 존경하는 부정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러나 그 존경심을 아버지께 표현하지 않았다. 딸이라면 자다가도 미소를 떠올릴 만큼 날 사랑하던 아버지. 무릎에서 내려 놓지 않으며 품어 키운 딸이지만 예리하게 아버지를 비판하던 유일한 야당이다. 끝까지 아버지에게 눈 흘기며, 엄마에게 잘해야지 내게 잘하는 건 소용없다느니, 집안을 챙겨야지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면 어쩌냐는 둥, 그 외에도 아버지가 자주 벌리던 마작판을 경찰에 신고 까지 했다. 어린 맘에 그 마작판이 옳은 모임이 아니란 생각을 해서였다. 오히려 경찰측이 황송해서 쩔쩔매던 장면도 생각 난다.  전문 도박단도 아닌데, 신고를 받아서 출동은 했지만 거기에 이름있는 우리 아버지가 계시니 경찰이 미안해 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울 아버진 날 나무래지 않았다. 마작하는 친구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게 곤란한 지경이지만 딸아이의 판단이 옳다고 해줬다. 그게 중학교 다니던 시절의 일이다. 그것 뿐인가. 아버지가 만난다는 어느 다방 마담을 찾아가 호통을 치기도 했다.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그랬다.  결국은 엄마를 난처하게 만들었지만, 절대로 아버진 내게 뭐라 한 마디도 안 하고 그저 아이가 똑똑해서 그렇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넘어가곤 했다.
        이치에 어긋나지 않고 사람을 대해주던 아버지. 아버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버지로 부터 받은 대우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도 울 아버지에게 억울한 대우를 받았노라고 불평할 사람은 없다. 이런 아버지로 인해 권투위원회는 든든한 반석위에 세워져 있었다. 아버지 혼자의 집념으로 기초를 다져 놓으니, 뜻을 같이 한 몇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지만 내 기억엔 없다. 후에는 권력있는 사람이 돕고, 돈 있는 사람이 돕고 해서 제대로 월급 주며 사람도 쓰고 버젓한 조직으로 큰 것이다. 급기야는 고 김 기수 선수나, 홍 수환 선수 처럼 세계 챔피온까지 배출하는 능력을 갖춘 권투위원회가 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법 어른이 된 시기에 제대로 조직체가 되어 잘 돌아가는 권투위원회가 아버지의 자리를 삯군에게 넘겨줬다. 일한 댓가를 지불할 수 있게 된 권투 위원회는 혼자 큰 것 마냥 까부는 애들 같아진 것이다. 그 당시의 처절하게 나락으로 떨어진 아버지의 위상을 난 지금도 가슴 아파 하고 있다. 아는것은 권투 뿐이다. 권투를 살리기 위해서 위원회를 조직하고, 맥락을 이어가기 위해 권력과 돈을 접목한 아버지의 지혜로 넉넉해진, 볼품 있어진 권투위원회를 쉽게 맡아 일하려는 삯군들이 들어섰다.  장기 집권이 이유였을까?  해체 될 수 밖에 없는 조직체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집권으로 몰아 부쳐 아버지를 밀어 낸 그들의 변명을 지금이라도 난 듣고 싶다.  그런 것이 세상 인심인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1982년도 4월에 추위 겨우 막고 살던 판자집 이층 월세방에서 세상을 마감하신 이후 권투위원회는 그냥저냥 존재해 오고 있다. 아마도 아버지의 공로를 기억하는 사람도, 고마워하는 사람도 지금은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권투에 조금이나마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현재의 권투위원회가 있기까지의 발자취에 한 번쯤 따스한 관심의 눈길을 주면 좋겠다. 아버지의 딸아이로 남아있는 내겐 다시 한 번 아버지의 권투에 대한 확고한 집념과 권투 사랑을 젖은 마음으로 돌아본다.  
        자신과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키워 온 권투위원회의 오늘은 아버지의 삶이 남긴 열매다. 결코 외면 할 수 없는 열매를 먼 이국 땅에서 바라 본다. 옛날 샹하이에서 아버지의 집념이 영글던 때, 난 엄마 뱃속에서 잉태되고 있었지만, 지금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버지가 밑거름이 되어 태어난 열매를 침묵으로 지켜 본다. 확고한 신념으로 먼 곳을 꿰 뚫어 보던 작고 매서운 매의 눈이 자신의 영역을 지켜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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