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기하는 행위

2005.07.05 02:06

노기제 조회 수:797 추천:110

042205                나를 포기하는 행위
                                                                노 기제
        스무살을 전후로 내 인생이 밋밋하던 때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음악감상이란  네 글짜에 매료 당했다.  절친한 친구 순표가 귀띰 해 주어 출입하기 시작한 음악감상실 르네상스.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그 자체가 무슨 큰 음악가라도 될 것 같은 착각을 하면서 공연히 분위기에 빠져 귀중한 시간을 갉아 먹었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드는지도 파악을 못한채 공연히 겉 멋만 들어 거의  매일 들르곤 했다. 이제 막 인생의 첫 장을 채색해야 하는 시기에 그 시작을 아무런 꿈도 보태지 않고, 알찬 계획도 가미하지 않은 채 거리에 떨궈진 휴지조각 처럼 나의 중요한 시간들을 버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을 만났었나? 무슨 이유인지 왼쪽 눈을 늘 하얀 안대로 가리고 다니던 사람. 훤출한 키에 언제나 똑 같은 복장이던  김수길이란 사람이다.  별로 말이 없었고 반 코트의 깃은 항상 올린 채 얼굴 상당부분을 가리고 다녔다. 크고 푹신한 감상실 의자에 묻혀 진짜 음악 감상만 하는 사람의 인상이다. 그 곁을 부하처럼 지킨 서울 문리대 뱃지를 달고  있던 하림이란 인물.  그리고 연세 의대생이었고 그들이 오형이라 불렀던 사람.  거기에 디제이 였던 안경낀 미스터 박이 있다.
        가끔 커단 첼로를 안고 나타났던 김수길이란 사람은 누군가의 것을 빌린다 했다. 그 사람 주위를 맴 돌던 경기 여고생,  현자라고 했던가. 눈이 유난히 작아 보이던 그녀는  나 보다 한 해 먼저  여고를 졸업  한 것 같다.  그 당시 그 여학생 졸업식에 많은 사람들이 갔던 모양이다. 어느 날 그 여학생이 나타나  김수길에게 건넨 말.  오빠가 준 선물 시집갈  때도 갖고 가겠다며 은은한 마음을 전했었다. 난 그걸 얼마나 부러워 했던지. 김수길에게  마음을 두고 감상실에 나오는 여자가 더러 눈에 띄던 시기였다.   나이가 좀 든 직장여성 하나가 집요하게 눈길을 보낸다는 소문을 나도 듣고 있었다 .
        그러던 어느날 그  여자가 작전을 바꿨는지 디제이 미스터 박에게로  총력을 쏟는다. 다들 그 여자의 진심은 김수길에게 있던 것을 안다. 나이 가장 어리고 그런면으론 아직 대상이 안 되던 내가 보기에도 그 여자의 작전이 읽어졌었다.
        어느날인가 밤 열시에 끝을 낸 감상실에서 디제이 미스터 박이 몇사람  모여 술 한잔 하러 간다고 함께 가잔다. 시간으로 보면 늦었지만 그런 모임이 생소한 내겐 특이한  경험이란 생각에 합석을 했다. 감상실 근처 무교동 어딘가였다. 둘러 앉고 보니  일곱명쯤 된 듯했다.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다.  그냥 낮익은 사람들이라  합석하기엔 불편함이 없었다.
다들 막걸리에다 토끼다리를 안주로 했던 것 같다. 토끼다리라니. 순간 토끼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찡그렸더니 소고기는 뭐 다르냐며 누군가 면박을 준다. 듣고보니 그렇다.  익숙함에 따른 무딘 판단이다.
연거푸 퍼 마시는 일에 열중했던 모두들은 내가 그들과 한가지로 술을 마신다고 생각했나보다. 어느장소에서든 잘 어울리는 내 태도가  그들에겐 술꾼들에 가담한 평범한 술꾼이었던 거다.
대화의 주인공은 단연  김수길에게서 디제이 미스터 박에게로 시선을 옯긴 그 여자였다. 그 여자의 속셈을 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 미스터박의 의견을 묻고 충고하고 뭐 그러면서 시간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다. 술들이 웬만큼 올랐는데 도무지 모임을 파할 생각들을 안 한다.
분위기를 깨는 일이지만 할 수 없다. 먼저 일어섰다. 혼자 갈 수 있겠느냐며 한마디씩 던진다. 물론이다. 십오분 정도 남긴 자정에 무교동에서 충무로 3가 쪽 인현동인 집으로 가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미스터 박이 따라 나온다.  데려다 주겠다며. 상관말라고 했다. 막무가내 따라나선다.  난 얼마든지 혼자 갈 수 있다. 지가 뭔데 날 바래다 준단 말인가. 걸음을 빨리 했다. 술이 취했는지  잘 걷지 못한다. 좀 천천히 가라며 열심히 따라온다. 을지로 3가까지 저만치 따라오는 것을 보곤 뛰기 시작했다. 자정이다. 집동네로 들어서니 엄마랑 큰오빠 내외가 서성이고 있다. 마침 아빠는 외국 출장중이시니 맘 놓고 늦어 본거다.
난 또 오늘이 너 어른 되는 날인줄 알았지. 큰오빠의 농담이 지금도 귓가를 울린다. 내가 만일 함께 술마시고 몸도 못 가누고  정신까지 혼미했더라면 그날 난 큰오빠 말대로 어른이 되고 말았겠지. 미스터 박이 아니었어도 어떤 남자에게라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나를 포기하는 행위가 바로 술에 취하는 행위란 생각을 한다. 내가 나를 힘으로 다스릴 수 없으면 힘 있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당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
마음다스리기야 마음대로 안 되니 어려운 일이지만 정신 바짝 차린 몸 다스리기야  맘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난  아직도 술을 입에 안 댄다. 메밀밭도 안 지나간다.  적어도 난 내 몸을 내 맘대로 움직이고 싶으니까. 일어서야 할 때 일어서고, 걸어야 할 때 걷고, 뛰어야 할 때 뛰기위해서.  
                                                                07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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