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설 수 없다는 두려움

2012.10.03 03:23

노기제 조회 수:787 추천:172

20120917                  돌아설 수 없다는 두려움



             클래식 등반을 한다. 즉 바위 타고 정상까지 올라가,  올라간 바위 뒷길을 걸어서 출발 지점으로 돌아오는 암벽등반을 한다는 뜻이다. 선등자가 확보 해 준 로프를 따라 올라갔다 그 로프로 다시 내려 오던 등반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또한 중간 쯤에서 힘 떨어져 더는 못 하겠다고 돌아 설 수도 없는 등반 형식이다.

             짧게 한 피치 올랐다가 하강 해서 출발지점으로 오던 등반은 비교적 쉽다.  두 피치 등반을 한 번 해 봤으니 그런 거겠지 생각하고 특별한 마음 준비 없이 클래식 등반에 임했던 9월 8일 등반은 암벽등반의 무서운 묘미를 내게 가르쳐 줬다. 크랙을 따라 비교적 힘 안들이고 올라 간다는 느낌이었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다. 높이 올라 갈수록 온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다. 선등해서 빌레이를 보고 있는 분들의 얼굴이 안 보인다. 그만큼 첫 피치가 길다. 백 미터는 족히 될 것이라 짐작했다.

             로프 한 동이 짧아 두 동을 이어 쓰니 매듭 있는 부분이 자꾸 크랙 어딘가에 낀다. 다음 등반자에게 던져 준 로프가 아래까지 도달하지 못한다. 말 등에 앉아 로프를 돌리는 카우보이 처럼, 로프를 춤추게 하며 몇 번이나 끼인 로프를 빼 보려해도 어디선가 또 걸려서 내려 오지 못하니 선등해서 등반자들 확보 해 주는 대장이 맨발로 오르락 내리락 매듭 부분을 찾아 그 험한 바위를 뛰어 다닌다. 등반 차례를 기다리며 그 모습을 볼 땐, 저 정도라면 올라가기는 수월 한 곳이려니 편한 마음이었다.

             막상 바위에 붙고 보니 첫 발 부터 쉽게 딛고 일어서기가 안된다. 경사를 묻는다면 아마 85도는 될거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것이다. 슬슬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만돌아설가?   요리조리 딛어 보고 그래도 포기는 아니다 싶어 이를 악물었다.

             먼저 지우,민우 두 아이가 올라 가고 내 차례까지 한 시간 반 이상 기다린 후라  이미 지쳐 있었던 모양이다.  선등한 대장의 등반 준비 완료 후, 등반 시작 시간이 늦었던 관계로 내 차례가 되었을 땐, 점심 때가 훌쩍 지난 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등반 전에 점심을 먹을 순 없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배고픔도 못 느낀다. 어떻게든 올라가는 것만이 최 우선이다.

             슬랩등반 보다는 크랙등반을 선호하지만 워낙 긴 등반으로 힘이 딸려옴에 올라 온 거리를 뒤 돌아 보니 까마득히 출발점이 보이지도 않는다. 위를 올려다 보니 빌레이 봐 주는 유대장도 원배님도 안 보인다. 죽어도 올라가야 한다. 아무도 내게 거기 딛고 조기 잡고 해 보라 할 사람 없다. 나 스스로 잡을 곳, 발 디딜 곳 찾아 올라가야 한다. 간신히 잡을 곳 디딜 곳 찾아 올라 서려면 팔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

   언제까지 여기 매달려 있을 순 없지 않은가. 위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나 다음으로 등반 해야 할 영규씨, 윤애씨가 아직 아래에 있다. 아무도 안 보인다. 소리를 쳐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그들이 내 지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좋은 운동도 오늘이 마지막 이겠다. 역시 나이는 안 되는구나. 이렇게 힘을 못 쓴다면 할 수 없는 운동이다.

   혼자 단편소설 한 편 쓰고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하늘이 도우시면 난 할 수 있다. 언젠 내 힘으로 살았나. 하나님 나 좀 안아서 올려 주세요. 딴 사람들 너무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요. 나도 배가 고파 죽을 지경에요. 빨리 올라가서 밥 먹을래요.

   끝이 코앞인데 도저히 잡을 곳이 안 보인다. 거기 슬링 잡고 올라 오세요. 유대장이 코치한다. 어? 그런 거 잡아도 되요? 그런 거 잡으면 반칙 아녜요? 반칙이 어딨어요. 올라오는 게 대수지.

   내 딴엔 양심적으로 바위만 더듬어서 올라서야 한다는 개뿔같은 자존심이 있었다. 잘못 심겨진 상식이다. 등산학교에서 안 가르친 부분이다. 폼도 잊어라. 올라서는 게 대수다. 그렇게 하면 훨신 쉽게 오를 수 있을 것 같다.

   막상 올라서 아래를 보니 이 백 미터는 올라 온 듯 아찔하다. 먼저 올라 와 기다리는 지우, 민우와 내 식량을 나눠 먹었다. 오후 세 시가 지났다. 유대장과 원배씨를 지나 안전한 곳으로 자리해 확보한 상태라 동선이 짧다. 두 분도 배가 고플텐데.

   누구든지 암벽등반을 준비할 땐, 작은 백팩에 비상식량을 항상 준비해아 겠다. 언제 무슨 이유로 혼자 바위에 매달려 얼마나 긴 시간을 있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기운이 떨어지면 위험하다. 자신의 기호 식품을 준비해야 먹을 수 있다. 남이 주는 식품이 입맛에 안 맞으면 못 먹는다. 죽어도 안 먹힌다.  

   길고 긴 첫째, 둘째 피치 죽을 힘을 다해 올라 또 두어 시간 기다렸다. 대원 둘 더 올라오고 빌레이 보신분들 장비 철수해서 다음 피치 준비하는 시간이다. 기다리면서도 기운은 솔솔 빠져 나가고 있다. 산길로 걸어 먼저 정상에서 기다리는 영선씨가 우릴 부른다. 곧 정상이다.

   짧게 보인 마지막 한 피치. 로프 없이 걸어서도 뛸 수 있을 것 처럼 보였다. 이 무슨 자만? 사방천지에 다 잡을 곳 디딜 곳이 보이는데, 안 된다. 잡고 버틸 힘이 없다. 딛고 일어 서 지질 않는다. 결국 유대장이 끌어서 오르게 했다.

   다섯시가 지나서 대원들 모두 바위 정상에서 늦은 점심들 나눠 먹으며 서로 고맙다 하고 서로 애썼다 하며 온통 바위산인 하산길에 들어섰다. 바위를 타던 출발점으로 돌아 가 남긴 배낭 챙겨 해가 꼴딱 지기 전에 캠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 함께 시작해서 모두 함께 돌아가는 길에 감사함이 넘친다. 어느 누구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 없다. 12세, 14세 민우 지우도 힘들어 한다. 물론 나이도 내 체력도 문제가 아니다. 다 똑같이 모두에게 힘든 운동인 암벽등반을 난 계속 할 것이다.

   끝도 모르는 길을 끝까지 가기만 해야 한다면 얼마나 두려울까. 내가 시작했던 곳으로 돌아 올 수 있음은 얼마나 다행인가. 성취감도 자신감도 충분히 맛 볼 수 있는 멋진 암벽등반을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다. 호락호락 쉽지 않은 인생을 바위에 붙어 있는 짧은 시간에 살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끝내는, 도전자가 승리 한다는 이 철칙을 직접 느껴보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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