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퍼스 커플을 꿈꾸다

2007.03.21 08:33

노기제 조회 수:714 추천:123

031907                        캠퍼스 커플을 꿈꾸다
        무엇이 계기가 되었을까. 뜬 금 없이 학교에 등록을 했다. 잘나가던 사무실 문 닫고 백수 7년 차다. 일 접었으니 뺑뺑 돌던 채 바퀴에서 내려와  있는 대로 늘어져 봤다. 시간을 죽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막상 등록을 하렸더니 어떤 과목을 택할 것인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와서 머리 싸매고 수학문제를 풀 수도 없는 일. 사실은 그런 욕망이 생기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내 주시는 어려운 산수문제 척척 풀어내던 그 시절의 빠릿빠릿하던 내가 되고 싶은. 이건 분명 욕망이다. 도저히 재현될 수 없는 상황이니 욕망이랄 밖에.
        집에서 2마일 남짓 떨어진 엘에이 시티 칼리지다. 우선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만으로 충분히 좋은 성적을 딸 수 있는 과목이라 생각하고 선택했다. 평생 생각도 안 했던 골프가 있다. 게을러서 운동도 안 하는 요즘의 내겐 딱 맞는 과목이다. 그리곤 플라밍고 댄스를 택하면서 부끄러워 혼자 웃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으려 결정했다. 그 다음이 대학 합창과 클래식기타 클래스다.
        모두 네 과목에 4.5 학점이다. 월 화 수 목 나흘을 학교에 간다. 백수 생활에 이골이 난 내가 견디기엔 무리였다. 피곤하고, 정신 못 차리게 바빠진 것이다. 숙제까지 있다.
        합창이라야 평생 했으니 뭐 별 것 아니려니 했다. 대충 악보 보며 노래만 자꾸 부르고 싶은데 같은 부분을 계명으로 반복하는 지루함이란. 클래식기타클래스는 무지 어렵다. 20여 년 전에 초급반을 완성했지만 긴 세월 뒤에 이어짐은 쉽지 않다. 강의 시간에만 의존하다간 포기해야 할 판이다. 잘 따라가지 못하는 손가락 놀림에 짜증이 난다. 뭐야 이거. 이 나이에 내가 왜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까. 댄스도 만만치 않다. 난 아마 몸 치인 모양이다. 순서도 외워지지 않고, 손과 발의 동작을 맞출 수가 없다. 골프? 냅다 쳐 대며 땀은 흘리는 데 도무지 재미가 없다.
        다 그만두고 도중 하차 하자. 다시 편하게 늘어져 시간 죽이며 살까 생각하니 그도 싫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공부할 나이에 대학생활이 없었으니 그 때 내가 대학 생활을 했다면 바로 캠퍼스 커플로 요란하게 연애 한 번했을 듯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도중 하차 한다면 또 대학생활이 없어진다. 그렇담 꿈조차도 가질 수 없다. 그렇다. 이번엔 견뎌보자. 누구나 학교 공부가 힘들 것이다. 힘들게 공부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조금씩 이뤄나가는 것이려니. 학교 다니던 시절엔 관심도 없었던 성적표가 지금은 제일 첫째로 꼽히는 내 관심사다. 무조건 성적은 최고 점수를 받고 싶다. 제 나이에 대학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열심히 해야 한다. 숙제도 반드시 하고, 많은 시간을 연습에 할애해야 한다.  
        마치 스무 살, 대학 신입생이 된 듯 내 몸과 마음은 상쾌하다. 목요일 오후부터는 시무룩해진다. 월요일까지 학교에 갈 필요가 없으니, 나이 먹어 할 일 없는 현실의 내 모습이 확인되는 시간들이 싫은 거다.
        날마다 꿈을 꾼다. 어떤 남학생으로 내 짝을 선택할까. 물론 난 스무 살 대학 일년생이다. 동갑내기일까. 아님, 군대 다녀온 복학생 오빠? 난 무얼 전공했을까. 이건 아직까지도 선 듯 결정이 나지 않는 문제다. 과연 난 무슨 과목을 전공으로 선택했어야 했는지. 또 상대방은 어떤 과 에서 골라야 했는지. 그렇게 확실한 소망이 없었으니 대학 생활도 내겐 허락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냥 꿈이나 꾸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 손 꼬옥 잡고, 아니 팔짱을 낄까. 항상 둘이 캠퍼스를 걷는다. 각자 택한 과목이 달라 교실은 다를지라도 찾아가고, 찾아오고, 시간이 촉박해서 뛰기도 한다. 잠깐 얼굴 한 번 보고 다시 돌아서 교실로 돌아간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보내지만 이런 뒤에 우린 우리의 삶이 영글어 영원히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이러는 우리 사이, 누구나 다 부러워한다. 누구도 감히 훼방할 수 없는 우리 둘의 사랑을 모두가 축복해준다. 때론 잔디에 누워 내 무릎을 베개 삼은 그의 준수한 얼굴을 찬찬히 본다. 보고 있어도 자꾸 보고픈 얼굴이다. 여인네 것보다 더 정교하게 심겨진 눈썹의 고운 선을 내 손끝이 따라간다. 알맞게 웨이브 진 머리칼을 다섯 손가락으로 빗질하면 어느새 따스한 그의 체온이 느껴진다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시험기간이 되면 한 동안 공부에 집중하느라 전화 통화도, 문자 보내기도 자제한다. 그도 나도 최고의 성적을 원하니까. 얼굴 보기가 등에 업은 아기 얼굴 보기보다 더 힘들지만 그런 시간에도 우린 그리움을 접어서 맑은 하늘에 띄워 보낸다. 견딜 수 없게 보고프지만, 참고 견디는 연습도 때론 필요하니까. 구속된다는 느낌을 서로에게 주지 말아야 한다. 언제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도록 서로가 자유를 주는 거다. 무슨 생각을 하나, 누굴 만나나, 무엇이 나 보다 더 중요하냐는 등의 질문은 우리 둘의 사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생각만으로도 아주 멋진 사랑을 하는 캠퍼스 커플이다. 삶의 한 부분을 아름다운 시간으로 꾸미는 일은 어느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다. 지혜로운 사랑을 할 수 있다면 정말 값진 인생이다. 몇 발 뒤로 물러나 조용히 바라보아 주는 사랑. 필요할 때 달려가는 준비 된 사랑. 어느 한 구석이라도 너 때문이라는 불평이 존재하지 않는 사랑. 난 이만큼 주는 데 넌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는 질책 같은 것이 전혀 없는 사랑. 자신 있게 혼자일 수도 있는 기다리는 사랑. 때론 친구들과 같이하느라 상대방을 동반하지 못하는 때도 있다. 어떤 이유이던 두 번씩 따져 묻지 않는 사랑. 자연스레 믿어지는 사랑. 상대가 지나치고 없는 자리까지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랑.
        이런 캠퍼스 커플을 한 번 꿈꾸어 봤다. 학교가야 할 시간이다. 가방을 챙기는 일로 내 하루가 행복해지는 시간.  중간고사가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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