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울린 전화

2004.05.02 09:00

노기제 조회 수:626 추천:104

101801 새벽에 울린 전화

노 기제

내가 사는 로스엔절레스에도 가을이 완연하다. 뉴욕의 세계 무역 쎈타, 쌍둥이 빌딩을 두 대의 여객기를 납치해서 공격, 파괴하고 삼천여 명의 귀한 생명을 희생시킨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 전역이 테러리스트와의 전쟁과 연관된 불안감으로 각 가정마다 조금씩은 편안치 않은 기운이 돌고 있다. 게다가 탄저병 감염 공포로 우편물 받는 것조차 스트레스가 되고 있는 이즈음, 나의 생활은 하늘에 모든 걸 맡기고 비교적 각종 공포로부터 자유롭게 살고 잇는 편이다.
새벽잠을 깨우는 전화 벨 울림이 짜증스럽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침 일곱 시까지는 잠을 자야 하루를 편안히 보내기 때문이다. 수화기를 들고 짤막하게 "네" 했는데도 아무 소리가 없다. 전화는 그대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아무 소리가 없으니 그냥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누웠다. 아직 일어날 시간이 아니니 더 자야한다. 그런데 또 벨이 울린다. 이번엔 아예 받지 않기로 했다. 한참을 울리다가 메시지를 남기라는 내 소리가 나오는 모양이다. 그 때 남편이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아아 형님이세요? 여기 있어요. 바꿔 드릴게요" 라며 내게 수화기를 건넨다.
서울에 있는 오빠다. "으응, 오빠야? 왜에?" "자냐? 지금 몇 신데? 일어날 시간 안됐어?" "아침 6시 20분, 서울은 밤 10시 20분이구나. 근데 왜?""야 너 귀신같이 서울시간을 알고 있구나. 왜는? 여긴 야단들이거든. 미국에 하얀 가루소동에다 거 뭐 탄저병 때문에 걱정들이 많아. 니넨 뉴욕이나 워싱톤보다 좀 들 걱정이 되지만, 야 그래두 신경이 쓰이잖니. 괜찮지?"
엄마, 아빠, 큰오빠, 작은오빠, 나, 이렇게 다섯 식구 중에서 남아있는 작은오빠와 나. 그것도 오빠는 서울에 나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산다. 여섯 살이나 위인 오빠에게 평생 존대어를 안 쓰고 버릇없이 살았지만 오빠도 그 점에 대해선 편하게 느끼며 불평이 없다. 나도 늘 오빠를 어릴 적 오빠처럼 가깝게 느끼며 사는 것이 좋아서 말버릇을 못 고친다.
괜한 걱정을 한다고 핀잔을 주고 교회를 안 다니니까 그렇게 불안하고 걱정이 되는 거라고 잔소리를 한 바탕 했더니 "그런가?" 하며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유난히 걱정 없이 사는 동생이 한 편 대견한 생각도 들고 다행이다 싶기도 한 모양이다. 사람 좋게 허허대며 안심한 듯 오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나는 나머지 몇 십 분을 마저 자려고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그런데 이 틀 후에 오빠는 또 전화를 했다. 이번엔 낮 2시에 하구선 대뜸 "지금은 자는 시간 아니지?" 라며 지난 번 아침 잠 설치게 했던 전화가 마음 아팠던 것을 말한다. "왜 또?" 해 놓구선 아차 했다. 오빠도 이젠 나이가 드는 걸까? 뭐가 그리 걱정이 돼서 이틀만에 다시 전화를 했을까. "괜찮지?" 하며 또 묻는다. 순간 오빠음성이 엄마 음성으로 들린다. 그렇지. 곁에서 보고 가까이 살면 아무 것도 걱정이 안 되지만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소식을 접하다보면 그게 다 내 피붙이에게 일어나는 일 인양 걱정이 되기도 하겠다.
그래서 나는 아주 부드럽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오빠를 불렀다. "오빠, 난 말이야. 하나님이 항상 함께 계셔서 아무 걱정이 없어. 죽는다는 것, 그건 우리들 맘대로 되는 것 아니잖우? 전쟁이나, 테러나, 탄저병이나 다 내 뜻대로 움직여 주는 것들 아니니까 지금 이 순간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며 그냥 열심히 살면 돼. 오빠두 내 걱정 뚝! 알았수?"
다시 안심이 됐는지 허허대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내 가슴이 뭉클하더니 눈가가 뜨거워진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싶어진다. 살아 계셨다면 오빠보다 몇 배나 더 걱정을 했으리라. 전화도 새벽이던 오밤중이던 하루에도 몇 번씩 하겠지. 그럼 난 신경질을 내며 걱정 말라는데 웬 걱정이냐고 소리를 냅다 질러 댔을지도 모른다. 어릴 적 못된 버릇대로. 나도 철이 들었나? 오빠한테 그렇게 소리 질러대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다. 그리고 오빠 목소리가 다시 듣고 싶다. 이번엔 내가 전화를 한다.
웬일이냐고 다그쳐 묻는 오빠에게 "으응, 아까는 깜빡하고 못 물어봐서. 오빠는 요즘 경기가 어떤지 궁금해서" 라고 둘러대니 갑자기 오빠 음성이 활기를 띤다. 뭐 어디어디에다 납품하기로 되어 있고 지금 어디에도 교제 중이고, 얼마 후에는 돈이 걷히기 시작 할꺼라고 서울 걱정은 아예 말란다.
지금쯤 생사를 확인조차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긴 테러 희생자 가족들의 가슴은 얼마나 추울까. 이 곳 로스 엔젤레스의 가을바람도 어깨를 움츠리게 하는데 뉴욕 쪽의 찬바람을 어찌 견디고들 있을까. 걱정된다고 전화를 걸고 물어 볼 사람이 희생되고 없는 그들의 안타까운 마음을 잠간 헤아려본다.
내가 걱정스러워 전화를 주는 오빠가 있음에 감사하고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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