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짱 된 사연

2003.03.23 01:44

노기제 조회 수:588 추천:101

112102 인기 짱 된 사연

노 기제

세상에 뭐 재미있는 일이 있나? 다 그렇고 그렇지. 몸은 왜 이리 아픈 데가 많은지. 그 좋아하던 운동도 꼼짝 하기 싫어서 날마다 미룬다. 이따 하지. 내일은 꼭 할거야. 그러다 보면 하루해가 지고 만다. 매사에 떨어진 의욕 따라 식욕도 떨어져 주었으면 좋으련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이다.
날마다 아침이면 이대로 그냥 잠들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울적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다. 바로 최면 클래스에 등록할 당시의 내 상태다. 게다가 왼쪽 반 신은 자주 저려옴으로 반 신 불수의 불안감마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막상 어렵게 등록은 했지만 최면에 대한 나의 태도는 불손하기 짝이 없었다. 흥, 최면? 네가 감히 날 걸리게 한다고? 해봐, 해보라니까. 내가 너 한테 넘어갈 줄 알아? 내가 누군데? 어림없지. 죽어도 난 안될걸.
강의 초반에 단체 최면을 유도하시는 교수님을 향해 속으로 비아냥대기를 계속했다. 세 번째 주 강의가 있던 날, 난 저요 저요를 외치며 자진해서 피험자가 되었다. 무언가를 체험하고 싶었던 거다. 과연 계속해서 등록을 할 것인지도 결정해야 되니까.
나는 안될걸! 하는 속내를 감추고 앞에 나가 앉았다. 눈 똑바로 뜨고 눈싸움하는 것도 귀찮아서 그냥 감았다. 최면 유도하시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속으로 말대답하면서 교수님의 실패를 기대했었다. 이어지는 후 최면 암시로 장황하게 엮어 가시는 화려한 축복 암시에 난 피식 웃었다.
난 아이가 없다. 아이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잘 양육하게 된다는 암시에 아니 웃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기가 있어서 사랑을 받고 자꾸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된다는 암시. 남편과 신혼처럼 뜨거운 관계를 회복해서 행복하게 된다는 암시에도 웃었다.
그러다 정말 아니다 싶은 순간이 왔다. 비싼 등록금 내고 이왕 배울 거면 확실하게 뭔가를 얻어서 내 것을 만들어야겠다는 계산이 섰다. 그렇담 도대체 최면에 들어간다는 게 뭐냐 말이다.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으니 어쩐단 말인가. 난 항상 쌩쌩하니 의식이 분명한데. 좀 멍하니 기절직전까지라도 가야 그게 최면상태가 아닐까.
아니다. 바로 이것이 최면이다. 내가 최면에 안 걸린다고 우기고 있는 이 멀쩡한 의식의 상태가 바로 최면이다. 그 다음은 강의에서 배운 대로 연습하기에 열심을 냈다. 강의실에서도 부정적인 반항이 고개를 들 적마다 그래봤자 나만 손해다 싶어 암시하시는 교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모두 나에게 적용해서 내 것으로 삼았다.
집에서 자기 최면을 연습하며 진정 미운 내 남편 곱게 보기를 갈망했다. 그리고 내가 쓰는 글은 무조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고, 내가 하는 방송을 듣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고 후 최면 암시를 거듭한다. 클래스에서도 타인 최면 시간이 되면 공연히 쑥스럽고 나는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지만 시침 뚝 떼고 심호흡하면서 얼굴에 철판을 깐다. 피험자가 완전히 나를 믿을 수 있는 의젓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준비한다. 비록 속으론 은근히 떨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요즘 부쩍 놀래는 일이 많다. 느닷없이 청취자라며 전화해서는 음성이 너무 좋아 사람 마음을 흔든다는 찬사다.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나를 발견했을 때 순간 그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처음 만난 이의 언급. 첫 대면에서 물음에 대답하는 나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따스해지며 행복감을 느꼈다는 소리. 촌스럽게 볶은 파마머리에 유행 떠난 행색임에도 나를 처음 본 순간 가슴 뛰는 사춘기적 사랑을 느낀다는 사십 년 지난 고교생도 만났다.
이젠 날마다의 시작이 행복하다. 마음도 뿌듯하니 편하다. 몸도 날아갈 듯 가볍다. 갑작스런 변화에 나도 의아하지만 교수님의 후 최면 암시의 효과가 이렇듯 확실하게 일어난 것에 클래스 모두도 놀랄 것이다.
후 최면 암시란 최면상태에서 깨어난 각성 상태에서 어느 일정한 시간에 내가 바라고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의 총 집합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외워본다. 그리고 이 지구를 향해 최면을 유도하고 후 최면 암시를 주어 우리 모든 인류가 아름다운 평화의 세상을 만들면 좋겠다.
정말 우리가 살만한 세상을, 아니 살고 싶은 우리의 세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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