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시선 풀고 보니

2005.01.21 09:58

노기제 조회 수:608 추천:106

011605                        미운 시선 풀고 보니

                                                                        노 기제

        버스가 꽉 찼다. 다른 버스의 가이드가 뛰어 올라와 혹시 빈자리가 없느냐고 몇 번인가 묻고 있다.  내 눈엔 분명 두 좌석이 빈 자리로 보인다.  운전석 편으로 두 번째 줄이다.  중년 부인이 혼자 앉아 있다. 가이드가 발견하곤 옆에 누가 있느냐고 묻는다. 아들 자리란다. 또 한 자리는 오른쪽으로 네번째 줄에 등치가 큰 남자가 혼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옆 자리엔 두꺼운 겉 옷들이 가득 쌓였다.  전혀 눈을 맞추지 않고 있으니 시선을 주고 머뭇거리던 가이드가 그냥 내려 간다.
        추수감사절 연휴면 의례 시작되는 관광회사의 스키여행 출발 직전의 모습이다. 한 회사에 다섯대 내지 여덟대까지 대형 버스가 떠난다. 관광 회사가  서넛만 된다해도  엄청난 숫자가 이 시기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이민자들의 생활이 향상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버스는 출발을 하고 유난히 멀미를 하는 난 곧 불편해진 상태로 앞 좌석 어딘가 양해를 얻어 이동할 수 있을까 하고  눈치를 본다. 여섯째 줄에 앉은 난 차멀미 지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앞에서 두 번째 줄 정도면 기분 좋게 장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좀 안 될까? 목을 빼고 앞쪽 상황을 살핀다.  레익타호 스키여행이면 리노에 있는 호텔까지는 빨라야 9시간 정도가 걸린다. 멀미를 피해 가려면 앞에 앉는 수 밖엔 없다. 멀미약따윈 약 자체만으로도 내게 멀미를 준다.
        그런데 그 둘째줄은 여전히 중년여인 혼자다. 내 사정을 뻔히 아는 동행인 유리가 그 여인에게 갔다 온다.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들 자리 란다.  버스는 이미 출발을 했고  그 아들 자리는 채워졌어야 하지 않는가? 또 오른편  넷째 줄 그 자리도 여전히 남자 혼자다.  이거 뭐야? 그 때부터 난 그 두사람 뒤통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아주 형편 없는 인간들 아니냐는 미운 마음이 끌어 오르며 멀미를 대신한다.
        다른 방법이 없으니 멀미를 할 필요가 없어진 모양이다.  계속 가재미 눈을 하면서 그 두 사람을 번갈아  흘기며 중얼 댄다. 정말 상종 못 할 인간들 아니냐.  같은 버스를 탔다는 자체도 불쾌하다.  살다 별 인간을 다 만난다느니, 한껏 의로운 채 교만이 버스 지붕을 뚫고 치솟아 오른다. 내가 차지하지 못한 앞자리가 당연히 내 자리인양 억울하고 분하고, 대신 차지한 사람이 끝도 없이 미워지는거다.
        아주 강하게 미운마음이 치밀어 올라서 인지 거짓말 같이 내 멀미는 사라졌다.  중간에 화장실을 들린다던가 점심을 위해서 버스가 멈출때마다 내 시선은 그 두 사람에게서 떠나질 못한다. 꼴 좀 보자는 심산이다. 알고보니 그 여자와 그 남자는 부부이며 진짜 아들이 있고  또 딸까지 동행이다. 결국 남매가 함께 앉고 부부가 따로따로 한 자리씩 차지하고 편하게 가는 모양이다.  진짜 대단한 이기심 아닌가.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하고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예정대로 스키를 타며 눈에 안보이는 미운 사람들 생각도 잊었다.  호텔에 돌아와선 쟈쿠지에 모여 스키여행의 즐거움을 얘기 한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인사를 나눈다.   스키경력 15년 가까운 내가 스키를 즐기는 경험담을 들려주며 거의 초보자들인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당신들 모두는 내가 처음 스키를 시작하던 그 나이보다 훨씬 젊은 사람들이니
겁내지 말고 과감하게 계속하라고. 운동을 함으로써 얻는 행복감을 경험해 보라고. 도전하는 삶에서 숨겨진 기쁨을 찾아 보라고.  
        다음날 아침 다시 스키장으로 가기위해 버스를 타려는데 등치가 아주 커단 아이가 맨 앞에 서 있다.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허리를 허옇게 들어낸, 추위에 움츠린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난  그 아이 곁으로 갔다. 바로 그 여자를 꼭 빼 닮았다. 엄마 자리 잡아주려 옷도 안 입고 내려와 있니? 히히힛 네에. 엄마가 멀미를 심하게 하셔서 앞자리에 앉아야 하거든요.  그랬구나.  어이구 신퉁하지. 이쁘다 얘. 엄마한테 그렇게 잘하는 아들이라 정말 이쁘다. 옷이나 제대로 입고 나오지 그랬니.  
        그 순간 후로는 내 마음에서 그 들을 향한 미움이 사라졌다. 숨통이 뚤린 시원한 기분이다.  오는 길에 그녀에게 다가가 먼저 말을 건다. 잠시 지독하게 미워 했었다고 말했다.  사실은 나도 멀미를 심하게 해서 그 사정 내가 더 잘 안다고 했다.  이어지는 가이드의 한 마디가 오래도록 나를 향한 사랑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제가요오. 꼭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이 담에 돈을 많이 벌어서요 버스를 제작하고 싶어요. 앞자리만 50개인 그런 버스요.”
        50명 제각기 멀미가 있다고 호소하니, 듣는 마음이 오즉이나 답답했으면 그런 소원을 품었을까.   앞으론 멀미가 심하니 앞자리 달라고 티도 내지 말리라  조용히 결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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