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목숨 그대에게

2012.06.19 03:57

노기제 조회 수:606 추천:147

20120618                  내 목숨 그대에게

   맡긴다. 맡길 수 있다. 믿는다. 믿을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갈급한 단어라 생각 한다. 나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이기에 둘이 합하여 가정을 이루고 가정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지만 하나의 개체로서 우린 다른 개체를 어디까지 믿고 살 수 있을까. 내게 가장 소중한 내 목숨까지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작은 천국을 이루는 천사들의 경지가 아닐까.
  
   지난 두 주말을 암벽등반 초보 클래스 학생으로 단체 생활을 했다.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의 일부 정도로 비중을 두었던 종목이다. 즐기며 할 수 있는 취미의 일종이려니 가볍게 생각 했다. 남편 덕에 살짝 맞보기 암벽등반은 경험이 있던 터라 대충 하면 되려니 편안한 시작이었다.

   첫 날 첫 강의부터 결코 가볍게 임할 취미의 일종은 아니란 경고를 느꼈다. 단순하게 운동 차원이 아니다. 내 목숨이 순식간에 날아 갈 수도 있다. 등반의 역사, 장비들의 개발과 발전 되어 온 과정, 그럼에도 많은 목숨들이 자연의 응징 앞에 묵묵히 사라진 사실들을 접하게 되었다.

   겸허한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등반 때 최소한의 숫자를 둘로 하라. 강사가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해야 한다. 즉 내 멋대로는 안 된다. 파트너와의 신의가 최우선이다.  마치 배우자를 만나는 마음이다.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고, 나를 맡기는 단계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오늘이 있기까지 한 번도 누구를 그렇게 믿었던 기억이 없다. 누굴 믿는 단 말인가. 하물며 내 목숨을 맡긴다고?  어림없는 말이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

   내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걸 맡기고, 온전히 믿고 살기는 했지만 인간을 믿는 행위는 불가능한 세상이다. 그럼에도 암벽등반에 입문하려면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인간끼리의 절대적 믿음이 첫 조건이다. 누구를 어떻게 믿고 내 목숨을 맡길까.

   암벽등반 때, 손가락들은 모아라. 발은 십 일자를 만들고 초보단계엔 발바닥 삼분의 일 앞부분을 중점적으로 사용한다. 암벽등반은 발로 한다. 장비를 믿어라. 특히 암벽화를 믿고 한 발 한 발 오를 때마다 체중을 따라 옮기며 무릎을 펴라. 반복하면 어느새 한 피치 60 미터짜리 자일 끝 부분이다. 그 다음 자기 확보를 실행해라. 파트너가 확보 해 줬기에 올랐으니, 감사한 마음 전하게 된다. 후 등자를 위해서도 우선 나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다. 그 다음 올라오는 사람의 확보를 준비하며 돕는다.

   등반에 사용되는 특수 용어들을 사랑의 언어인양 주고받으며 준비 된 상태를 서로 확인하고 바위에 오르기 전, 자일로 연결 된 두 마음이 뜨거운 사랑을 빚어낸다. 출발 지점에서 확보를 보든, 선등해서 멀어진 거리로 서로 눈맞춤 없이 확보를 보든, 뜨거운 믿음의 교류는 자일을 통해 이뤄진다.

   사랑, 어떻게 만들어 질까. 사랑하게 되면 믿음은 말없이 따라 온다. 첫 눈에 사랑할 수 없다면 시간의 투자가 필요하다. 관심을 갖고 알고자 노력 하는 거다. 함께 교육 받게 된 동기들의 이름과 얼굴을 익히려 결정하니 열 일곱 전부를 쉽게 외웠다. 먼저 다가가 이름 불러 주고 인사를 하며 친근해 지니 사랑스럽다 느껴진다. 함께 교육생이 된 동기들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그래야 내 목숨을 맡기도록 믿을 수 있는 경지가 될 터.

   열일곱 학생들을 위해 투입 된 실전 강사님들의 봉사정신 역시 뜨거운 사랑이다. 등산과 달리 암벽엔 그늘이 없다. 땡볕에 노출되어 학생들 보다 일찍 도착해서 필요한 장비들 설치하고, 안전에 안전을 목표로 헌신 하신다. 먹이고 재우기 위해 텐트 치고, 식사 시중에 많은 분들의 사랑이 여러  겹이  되어 교육생들을 감싸고 있다. 안온하다. 믿음이 솟는다.

   가격이 높은 각종 장비들이 바위에 깔리고 박혀 있지만, 천재지변으로 인해 등반이 어려울 경우, 무조건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처하라. 내 목숨이 가장 소중하다. 딱 하나 뿐인 내 목숨을 챙겨라. 나머진 다 버려라. 각종 이론 교육시간에 강사 여러분들이 알차게 준비한 강목들이 엄청난 양이지만 요점은 “죽지 말고 살아라” 다. 그러기 위해 2톤이란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각종 장비들과 로프 매듭법등으로 학생들에게 믿음을 준다.

   말 잘 듣는 학생이 아니고, 강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학생들로서 무사히 예정 된 과목들을 이수하고 열다섯 학생이 졸업 했다. 줄곧 평안 했던 건 아니다. 두려움도 잠깐 스쳤고, 중도 포기하고 싶던 순간도 있었다.

   자신의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는, 믿음과 사랑을 끄집어내어 실천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신비한 암벽등반을. 철저한 준비, 겸손하게 숙인 고개, 믿음과 사랑으로 한 덩어리 된 세상을 우리가 속한  이 사회에서 다시 만들고 싶다.*****

  
2012년 8월 6일 중앙일보 문예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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