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파지는 이유

2013.12.30 09:45

노기제 조회 수:604 추천:107


20131129                   내가 아파지는 이유
                                                노기제

        나는 예수님이 아니다. 물론 부처님도 아니다. 그런데 자주 착각을 한다. 예수님처럼 부처님처럼 불쌍한 저들의 문제를 내가 꼭 해결해 줘야하겠다는 착각 말이다. 그리 생각해 놓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총동원해서 문제 해결을 주도하려 애를 쓴다.
        베풂의 꼬리에 따라오는 측량 안 되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쁘기만 한 건 아니다. 다른 문제들은 내가 어쩌지 못하는 종류들이지만, 작은 경제적 문제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예수님인 척, 부처님인 척, 잘난 척 베풂의 결과는 그들을 파멸로 인도한 결과가 되거나, 고고한 나의 멋지던 모양새가, 역으로 이용당해서 볼품없어 진 모양새로 남게 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인척 간에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내 자식이, 내 부모가, 내 형제가, 내 친구가, 혹은 친근해진 남에게 베풀던 사랑이 교묘하게 이용당했다는 씁쓸한 느낌을 피할 수 없게 된 슬픈 예가 친구 리엔이다.
        유난히 풍족한 집안에서 오빠 둘, 남동생 둘을 둔, 고명딸로 아빠 사랑을 넘치게 받고 성장했다. 아무에게도 지지 않는 미모라 자신하는 엄마의 특이한 질투로 피멍이 들며 고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우연히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타고난 천재성으로 부와 학위,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성공한 여성으로 인생 후반기를 맞고 있다.
        계모의 구박이란 것은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익히 알고 있지만, 리엔이 들려주는 친엄마의 구박은 세상 어디에서도 듣도 보도 못할 믿을 수 없는 얘기들이다.
        집안에서 여자는 엄마랑 딸, 단 둘 뿐이다. 아빠나 남자 형제들의 밥상엔 장조림, 계란찜, 명란젓 등 맛있는 반찬들이 즐비한데, 고명딸인 자기에겐 늘 콩자반, 멸치조림, 감자요리 등, 지금도 먹기 싫어 절대 안 먹게 된 반찬들뿐이었단다.
        먹거리 차별로 끝났다면, 무에 그리 한이 되었겠느냐만, 엄마의 학대는 격한 매질로 이어졌단다. 심하게는 애를 번쩍 들어서 머리를 벽에다 꽝꽝 부딪게 휘휘 돌린단다. 그래서 머리통이 깨지고 쇠를 박아 이어 놓고 지금까지도 머리가 울퉁불퉁 흉터가 심하다.
        왜 아빠에게 일러바치지 않았느냐니까, 그랬다간 완전히 죽음으로 직행할 것 같아서 놀다 다쳤다는 둥 엄마가 시키는 대로 거짓말로 둘러대며 살았노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풍족했던 집안이 아빠의 사업 실패로 어려워졌다. 행인지 불행인지 말 못할 흉한 일을 당하면서 미국행이 열리고 어린 나이에 몸이 부서지게 일했다. 오직 성공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공부하면서 부모 형제들 미국으로 초청한 후, 뒤바라지는 멈출 날이 오지 않았다.          사십팔 년 미국생활에 결혼도 안 하고, 엄마가 그리도 사랑하던 남자 형제들 다 자리 잡도록 도와주고 각자 자기의 생활들 그런대로 이어가는 요즘도 걸핏하면 조카들 치다꺼리, 변덕 심한 엄마의 사치벽 받아주기로 편할 날이 없는 리엔이다.
        답답한 마음에 왕래를 끊어보라 했다. 92세 된 할머니가 아직도 옷에 가구에 걸핏하면 딸에게 연락해서 갈아 치운다. 수시로 전화해서 이 자식 저 자식, 그토록 애지중지 기른 아들들 흉보느라 시간을 뺏는다. 물론 엄마에게 드는 모든 비용은 딸의 몫이다. 98세로 돌아가신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고 떠나셨다.
        머리에 종양이 있어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고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딸의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슨 경우인가. 엄마와 딸. 어떤 관계인가. 왜 리엔만 그리해야 하는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 신 예수님 말씀을 내게 일깨워 주는 리엔. 내겐 전혀 불가능한 말씀이다. 물보다 진한 게 피라는 말도 한다. 그것도 난 이해하지 못하겠다.
        몸이 좋지 않아 낮 열두 시가 넘도록 침대에서 뒹굴다 오늘이 추수감사절인 것도 몰랐단다. 엄마에게 전화해 보니 어느 녀석 하나 그림자도 안 비쳤다는 말에 어지러워 간신히 일어나 약 먹고 추스fms단다. 엄마 떡 만둣국 사다 줘야 한다나. 왕복 140마일 거리다.
        자기도 병들어 성치 않은 상태에서 엄마이기 때문에 그토록 헌신하며 모셔야 한다고 우기는 마음은 인간의 마음은 아니라 생각된다. 리엔의 마음에 예수님이 들어가셨겠지. 과연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인간적인 용서와 베풂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걸까? 그렇다면 왜 리엔은 그리할 수 있고 나는 절대 그리 못하는 걸까?
        난 내가 하고 싶을 때만 베푼다. 난 내가 해 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그리한다. 리엔처럼 자기를 죽도록 학대한 엄마에게라면 절대 한 푼도 안 줄거다 난.
        길거리나 고속도로 출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동정하는 마음도 생기고 선 듯 내 소유를 나눌 수 있다. 부모 형제나 친인척이라도 얄밉게 굴면 한 푼도 안 나간다. 돕는다는 차원이 까다로운 조건을 동반한다. 작게라도 내 등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직간접적으로 불손한 감정을 보인다면 절대로 내 도움은 없다.  
        서둘러 엄마에게 떡만둣국 사다 저녁 챙겨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리엔을 만나 함께 식당으로 간다. 내 앞에서 한식으로 식사를 하는 천사를 보고 있다. 얼굴 표정에 불평이 안 보인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난 아파진다. 아프지 않으려 베푼다. 또한, 나의 선한 베풂에 악하게 화답하는 사람을 만나도 나는 아파진다. 절제하지 못하고 조건 없이 베풀었음을 후회하게 된다. 나도 리엔처럼 조건을 초월해서 사랑을 베풀고 후회하지 않으면 좋겠다. 천사에게 저녁을 대접하는 내 마음이, 천사의 마음을 닮는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 해 본다. 추수감사절 이 저녁에.

201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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