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볶음밥

2003.02.16 03:19

노기제 조회 수:673 추천:89

김치 볶음밥
노 기제

"애들한테 연락은 해 보는데 만약 안되면 나랑 둘이서 만나면 되지 뭐."
오늘 동기 등산에 참가하지 못한 명애의 초청이다. 동창들 다 놓치고 만나지도 못하겠다 염려했었는데 우선 안심이다. 일요일 정기등산을 통해서라면 수고하지 않고 많은 동창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더구나 남자 동창들에겐 따로 연락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어릴적 남녀공학의 묘미가 나이 들면서 한 몫 보는 셈이다. 산행은 못하더라도 만날 기회는 있다.
양쪽 조카들 혼인 날짜가 결정되고 남편과 의논 끝에 나만 혼자 떠나게 된 서울 나들이다. 이렇게 특별한 일이나 있어야 마지못해 나서곤 하는 서울행. 나름대로 꼭 거쳐야하는 행사가 사대부중고 동기들의 일요 산행이다. 3주를 머무는 일정인데도 일요 산행에 참석하기가 여의치 않다. 호구지책으로 산행후의 애프터 모임에 합석키로 명애가 애를 썼다.
산행에 참가하는 동기들은 이미 집을 떠난 시간이니 연락처가 쉽지 않았는데 다행이 지각쟁이 숙이가 연락병이 되었다.
시간이 좀 이르긴 해도 명애와 함께 들어선 호프집. 경양식과 맥주를 즐길 수 있는
경쾌한 분위기다. 남자동창 박 해우가 경영한다. 박 해우 라면 키는 큰 편에 안경이 잘 어울렸던 말수 적은 인상. 중학 삼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말 한마디 나눠 본 일 없는 동창이다. 대의원 회의나 각 반 대표들 모임때 얼굴을 마주했던 관심이 갔던 동창중의 하나다. 중학 졸업 후 38년이 되는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동창이라면 정말 기분 좋은 다시 만남이다.
하나 둘 들어서는 등산복 차림의 반가운 얼굴들. "아하 기순씨, 반갑네." "여어, 얼마만?" 몇 낯익은 동창들과 함께 어리둥절 처음 보는 이들도 있었다. 중학 졸업 후 타교로 옮긴 나처럼 타교에서 사대부고로 입학했던 타교생들이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느라 명애가 진땀을 뺀다. "기순이, 박 기순. 중학교 때 일등으로 들어온 애." 딱히 내 세울 것이 없으니 나를 소개하는 애들마다 본의 아니게 이용하는 간판이다.
아니 그런데 이럴 수가? 박 해우 마저도 아리송한 표정이다. 훌쩍하니 컸던 키가 중간의 체구로 바뀐 모습이지만 난 금방 알겠는데. 그 애도 나도 중학교 때 컸던 키는 자라기를 거부하고 중간키로 남았다. 여전히 말수는 적고, 젊잖은 아저씨가 되어 있다.
얼굴에 한 아름 솟아오른 웃음으로 반가움을 대신한다 뭣 좀 드셔야 않겠느냐고 메뉴를 건넨다. "저녁 시간인데 식사를 하셔야죠." 맹물 잔으로 건배하는 고집을 눈여겨 본 모양이다. 술 마시는 사람들은 술과 안주가 저녁을 대신 할 수도 있겠지만 맹물로 분위기 맞추려면 배는 좀 고픈게 사실이다. 메뉴를 차례로 읽으면서 지극스레 권한다. "김치 볶음밥 어떨까요?" "아-, 그거 좋겠어요. 돼지고기는 빼구요." "그럼 한우 넣어서 해드리죠. 제가 드리는 특별 써비습니다."
이런 종류의 선물은 처음이다. 김치 색깔이 곱게 물든 볶음밥. 한 숟갈 듬뿍 입에 넣었다. 따듯한 마음이 전해온다. 중학교 때 느끼고 싶었던 마음이다. 약간 섞인, 볶은 소고기의 고소한 맛도 생전 처음이다. 알맞게 볶아진 끝물이 김장김치가 새콤한 맛을 준다. 어릴 적 고소한 꿈에 중년의 새콤한 재회가 넉넉한 농담이 되어 들린다. "옛날에 딴 맘 품었었구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 야한 눈웃음은 여전하구먼." 내가 무슨 눈웃음이 있으랴마는 구태여 아니라고 변명할 생각도 없이 함께 웃어넘긴다.



어느 좌석 어느 모임이 이처럼 편하게 농담인 들 할 수 있을까. 체면까지 챙기며 조심스레 말하고, 적당한 때 웃어야 하는 모임보다는 훨씬 편하다. 어릴 적 느낌도 솔직하게 말하고 지금의 만남도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만의 공간. 남녀 칠세 부동석 시절을 지나온 우리세대의 일대 반란 일 수도 있다.
중학 시절에는 불편하기까지 했던 남녀 공학의 다른 면을 세월 지난 이제라도 누릴 수 있음이 즐겁다. 아차 해서 동창들 만나지 못하고 명애 하고만 만났더라면 아쉬울 뻔했다. 고소한 소고기 맛에 알맞게 섞인 김치 맛. 거기에 곁들인 박 해우 동창의 따스한 마음이 연출 된 김치 볶음밥을 어디에서 맛 볼 수 있었겠는가. 눈 내리깔고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던 남자 동창들. 어릴적 이야기 기억해가며 깔깔거렸던 모습들이 로스앤젤레스 어느 식당 김치 볶음밥에 포개진다.
또 다른 서울 나들이가 주어지기를 기대해본다. 오래 동안 기억에 남을 그 김치 볶음밥의 맛을 생각하며 수화기를 든다. 서울은 지금 일요일 아침인데 명애가 아직 집에 있을까?. 오늘 등산은 어느 산으로 정했을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거나, 우박이 쏟아져도, 모이는 사람끼리는 언제나 떠난다는 정기 산행. 그들이 나를 부른다.
06120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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