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마음 가꾸기

2003.02.16 03:41

노기제 조회 수:463 추천:104

101801 예쁜 마음 가꾸기

노 기제
나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우리 나라 속담에 근거해서 고운 말만 듣고 싶다. 그렇다면 우선 가는 말이 고와야 한다. 바로 그것을 연습하면서 살고자 방법을 궁리했다. 일상생활에서 나 혼자만 고운 말을 쓰기란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금방 거친 말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많은 연습을 하다보면 거친 반응에도 웬만큼은 곱게 상대할 수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연습상대는 우리 집 강아지 윈디로 정했다. 윈디는 독일산 작은 슈나우저(schunauzer, 수염이라는 뜻)로 나이는 석 달 후면 네 살이 되고 몸무게는 13 파운드의 암놈이다. 내가 윈디를 연습상대로 정한 이유는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윈디와 함께 하고 싶어서 사무실도 집으로 옮겨 놓고 무슨 일이던 집에서 하려고 애를 쓴다. 자연히 윈디는 항상 내 곁에 있다. 그러나 강아지와 어떻게 말 연습을 하겠는가. 말이란 마음에서 나온다. 물론 머리가 지시를 하지만 그 머리도 내 마음 상태에 따라 지시의 방향도 달라진다. 내가 결심한 것은 윈디와 함께 있으면서 내 마음을 예쁘게 가꾸자는 것이다.
우선 강아지를 보면 나를 해치려는 의도가 없다는 것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방어 태세도 안 생긴다. 그리고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때론 귀찮고 성가실 때가 있다. 지나칠 정도로 다람쥐와 신경전을 벌이며 시끄럽게 짖어댈 때, 무엇이던지 우리 집 앞길을 지나기만 해도 막무가내 악을 쓴다. 집안엔 누구라도 얼씬도 못하게 한다. 한 번 짖기 시작하면 신문지로 말아 만든 몽둥이로 마루바닥을 치며 무서운 얼굴을 할 때까지 고집을 부린다. 그럴 때에라도 난 화를 내지 않고 알아듣도록 말로 타이른다. 그 할아버지는 앞집 정원산데 윈디가 바보라서 몰라보는구나. 너 바보 아니잖아. 그리구 지금 지나가는 사람은 매일 걸으러 가는 할머닌데 너 이쁘다고 했던 그 할머니.
바로 이 방법이다. 시끄럽고, 말 안 들어서 화가 날 법도 하지만 우선은 차근차근 말로 한다. 물론 나는 사람의 말을 하고 윈디는 강아지 말로 바꿔서 알아들을 것이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설명을 한다. 착하고 예쁘다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나갈 일이 생기면 어디어디 들려서 무슨 볼일을 보고 대강 돌아 올 시간도 얘기 해 준다.
처음 시도했을 때는 그야말로 알아듣거나 말거나 그냥 일방적으로 얘기하곤 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점을 발견했다. 잠깐 신문을 가지려 앞마당에 나갈 때나 또는 뒤뜰에 물을 주려 아무생각 없이 문을 열고 나서면 눈을 똑바로 뜨고 짖어댄다. 그것도 악을 쓰며 짖는다. 미리 설명을 안 했다는 불평이다.
차츰 이 방법이 익숙해지며 장시간 외출 시에도 전혀 따라나설 기미를 안 보인다. 다소곳이 알아듣고 혼자 집 지킬 채비를 하는 듯 편한 자세로 나를 바라본다. 마치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라는 듯 안심을 시킨다. 날이 지남에 따라 우리사이의 대화는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알게 모르게 남편도 합세하게 되었고 내 마음도 많이 부드러워져서 남과의 대화가 눈에 띄게 나긋나긋해졌다. 대화에서 부정적인 요소가 빠지면서 남의 심정을 알아주기에 익숙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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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습관이 된 이 대화를 곁에서 듣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다. 마치 애 없는 여자가 정신병자처럼 강아지를 애 취급한다고 눈살을 찌푸린다. 억울한 취급이다. 곱게 이어지는 강아지와의 대화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마음도 순수하고 예쁘다. 눈총 주는 사람들은 정서가 다른 탓이라고 이해하기엔 마음이 약간 쓰인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도 아름답게 느끼는데 아주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란 무시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허기사 십대의 자녀들과 이제 막 갈등이 시작되는 부모의 눈으로는 강아지를 사람 취급하는 모양이 못 마땅하기도 하겠다. 자기네는 자녀들 걱정에 친구들 모임이나 여행에 마음대로 못 가는 제약을 받지만, 이 여잔 강아지 때문에 모임도 여행도 제약을 받는 모습이 영락없이 정신병자로 보이는 것이다. "우리 딸래미 때문에..... 혼자 두고 밤에 나갈 수가 없어서...."라며 저녁 초대에 응하지 않는 것이 진짜 못 마땅하다는 눈치다. 그러나 내 나이정도면 자식들 결혼해서 손자 손녀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애 없는 여자의 이상스런 행동이라고 치부하기엔 무리가 아닐까.
그렇지만 나는 윈디 때문에 날마다가 행복하다. 내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아이구 우리 이쁜이"란 단어가 나를 점점 이쁜이로 만든다. 지금은 가끔 말을 안 들어도 예쁘고, 내 뒤꿈치를 잘근잘근 물려고 따라 다녀도 예쁘고, 눈을 똑바로 뜨고 악을 쓰며 덤벼도 예쁘다. 이렇게 연습을 하다보면 어떤 종류의 밉살스런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처음부터 화를 벌컥 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거칠게 응수하는 말도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이게 다 우리 예쁜 윈디 덕분이다. 혼자서야 이런 연습을 할 수가 없지 않은가. 윈디가 있으니까 난 날마다 연습을 해서 아주 고운말을 누구에게나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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