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의 데이트

2003.02.16 03:50

노기제 조회 수:619 추천:89

082701 황혼의 데이트
노 기제
서쪽 산허리에 몸을 걸친 해를 보며 인생 육십대를 떠올린다. 예전 같으면 해가 서산을 꼴딱 넘어갔을 연세가 아닐까. 요즘 육십이면 청춘일 수도 있는 좋은 세상이다. 건강관리, 인생관리 웬만큼 하고 살면 육십대에 '인생은 이제부터' 라고 외칠 법도 하다.
한 여름의 간판인 칠월에 수상축제를 주관하는 단체에 참여했다. 10대 자녀들을 위해 가족단위로 참가한 경우가 대다수이니 연령층은 10대 20대 30대가 거의 전부인 아주 젊은 참가자들이다. 간혹 40대도 있지만 부모로서 참여한 것이지 딱히 래프팅이라는 공연에 직접 주연급으로 참여한 것은 아닌 듯 보였다.
그렇지만 나는 다르다. 물놀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물을 향해 달려갈 만큼 특별한 열정이 있다. 이번 래프팅도 이런 저런 이유로 도저히 참석할 수 없었지만 모든 것 다 접어놓고 주연을 하겠다고 혼자 참여했다. 주위의 의아해하는 눈총 따윈 실력으로 무마하리라 마음까지 설레면서 집합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래프팅 그 자체를 즐기기엔 걸맞지 않는 중간 노인네다. 딸린 아이들도 없이 혼자 참가했으니 약간 갸웃둥 하는 표정들은 피할 수 없다. 각오는 이미 하고 있었으니 고개 꼿꼿이 들고 파킹장을 나서고 있는데 누가 내 이름을 부른다.
언제 어디서 인사를 나눈 지인 인지 서로가 기억은 못 하면서 확실히 초면은 아닌 분이다. 학연, 지연, 교회연 이리저리 다 끄집어내도 아귀가 맞지 않는다. 발음도 또렷이 내 이름을 부르신 것은 신문에서 내 글을 읽으신 때문이란다.
박 여사의 말씀이 나이 육십인데 여길 왔노라시며 내가 느낀 그 눈총을 의식하시는 모습이다. 어머, 그렇게 안 들어 보이세요. 속으로는 낭패라 싶었다. 내가 제일 연장자로 좀 튀어볼까 했는데. 그뿐인가. 동행이 있다고 하시며 남자 분을 소개하신다. 족히 육십대 후반은 되셨다. 아뿔싸, 주연자리는 내 드려야 한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다. 실력이다. 래프팅이 뭐 아무나 하는 건가. 연세가 있으시니 실제 공연 때는 불참하시지 않을까. 그러면 당연히 내가 튀는 거지. 나이는 많으면서 래프팅은 젊은이들 보다 월등하게 우수한 실력. 바로 이 실력을 내가 발휘하면 되는 거다.
각오도 단단히 여덟 개의 보트를 띄우고 참가자들이 물에 떴다. 이크 이게 웬걸. 보트에 앉아보니 어디 한 군데 몸을 잡아주는 곳이 없다. 안내자의 설명을 듣고 주의 사항을 염두에 두지만 같은 보트에 탄 열 두 명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몸을 의지해야 할 곳이 없으니 힘을 받혀 줄 수가 없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 왼편 뒷자리에 앉았다. 바로 내 뒤로 박 여사가 앉고 바깥 선생님은 오른편 맨 뒷자리에 앉으신다. 다행히 맨 앞에 주최측 진행자 임 선생과 임 기자가 자리한 것이 쬐끔 마음이 놓인다.
드디어 구령에 따라 노젓기가 시작되고 보트는 물살을 따라 속력을 낸다. 눈앞에 바위가 줄을 맞춰 쪼런히 앉아있다. 앉은키가 들쑥날쑥 물길을 가른다. 오메 겁나는거. 저길 어떻게 지나간담? 안내자의 구령이 바뀌면서 보트도 방향을 바꾸며 키 작은 바위 쪽을 슬며시 넘어 미끄러져 내려간다. 후유, 안심이다. 방향을 바꿀 때 한쪽으로 쏠리면서 박 여사와 나는 보트 안쪽으로 나동그라졌다. 안쪽이니 망정이지 바깥쪽으로 굴렀으면 영락없이 물에 빠지는 거다. 빠지면서 바위에 부딪기라도 한다면? 아유, 아시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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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비를 몇 번인가 넘고 넘어 평평한 물에서 수영을 하면서 쉬어간단다. 역시 10대 아이들이 먼저 첨벙첨벙 뛰어든다. 마음 같아선 단숨에 뛰어들고 싶지만 앞가슴에 숨긴 돈 지갑이 나를 잡는다. 그때 진행자 임 선생이 뒤로 굴러서 물로 들어간다. 야아, 왕 오빠 빠졌다. 뒤이어 10대 꼬마가 첨벙한다. 야아, 새끼오빠도 빠졌다. 변소가 급해서 빠졌대요. 듣는 사람들이 까르르 재미있어한다. 뒤에서 박 여사가 "자기가 제일 재미있게 노는구나" 하며 아낌없이 웃어주신다. 바깥 선생님 또한 지갑 때문에 물에 못 들어간다시며 넉넉하게 어울려 주신다.
아내에게 웃음 한 번 큰 소리로 웃게 하지 않는 전형적인 한국 남편상은 아니다. 좀더 물살이 쎈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박 여사의 말을 들으며 난 속으로 감탄을 했다. 사실 난 좀 무서웠는데. 이것보다 경사가 급하고 물살이 쎄면 난 기권 할라요.
보트 여덟이 평평한 지역에서 옹기종기 가깝게 되자 난 안내자에게 물싸움을 하자고 제의했다. 패들(노)로 물을 쳐대며 상대편 보트로 튕겨 보내기다. 모두들 있는 힘을 다해 물싸움을 하고 너도나도 다 젖었다. 물론 박 여사도 바깥 선생님도 흠뻑 젖었다.
그 연세에 래프팅을 데이트 코스로 선택하신 두 분이 너무 멋져 보인다. 다음 데이트는 급수를 올려 물살도 쎄고 경사도 급한 코스에서 두 분이 부둥켜안고 보트 밖으로 동그라져 물에 빠지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 그래도 두 분은 재미있어 하실테니까.
그 땐 지갑을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아름다운 황혼에 좀 더 화려한 색깔을 칠해서 두 분에게 제공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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