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올 수 있는 자리

2003.02.16 03:54

노기제 조회 수:507 추천:83

돌아올 수 있는 자리
노 기제
"나, 못 오게되면 어떡하지?" "왜? 자리 됐다는데." "그래도 혹시..." 무엇인가 남편으로 하여금 확신에서 멀어지게 하는 모양이다. 번갯불에 콩 볶듯이 주말을 이용해서 서울에 다녀오기로 결정을 했다. 어렵사리 결정은 내렸지만 조건이 따라주지 않는다. 가는
것은 언제든 갈 수 있는데 오는 자리가 없단다. 한 달 가량 후에나 확실하게 자리가 있단다. 여행사에 부탁한 후 무작정 오는 자리가 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어떤 노력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기다림이란 생명을 선택할 기회를 놓친 형님과 똑 같은 처지다.
요즘은 누가 아프다 하면 암이란다. 그렇게도 첨단의학이 활개를 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하는 암이 우리 시댁에도 침공했다. 남편의 바로 위 형님이다. 올해 쉰 아홉. 주위에선 아홉 수가 나쁘다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깟 미신 같은 아홉 수는 한국나이로 예순이니 거론 할 필요도 없다.
형님의 투병이 시작된 것은 작년 십 일월이었다. 스무날 동안 미국을 방문하셨던 형님의 병세는 심각한 상태였다. 배가 항상 더부룩해서 식사를 편히 못하셨다. 소화가 좀 안된다고 생각하셨지만 남편의 판단은 복수가 찬 것 같단다. 우선 서울 가시면 종합검사부터 하시도록 했다. 결과는 역시 암이다. 그 동안 형님의 생활이 암에 걸릴 수밖에 없는 패턴이었음을 감지했으니 그 생활 방식을 바꾸시도록 조언을 드렸다. 형수를 설득해서 건강식을 공급하도록 식생활을 바꿨다. 학교 다닐 땐 열심히 했던 운동도 직장생활에 치이고 가족 부양에 시달리며 전혀 인연을 끊고 사셨단다. 이제부터는 꼭 운동을 하셔야 된다고 각서를 쓰시도록 종용했다. 그냥 조용한 미소로 일관 하셨다. 아직 상태를 모르셨기 때문이리라.
한국에서 환자를 대하는 방법이 미국하고는 다르다는 이유로 형수가 고개를 저었다. 병원 측 의사들도 가족의 의견에 따르는 모양이었다. 위급한 상황을 환자에게 숨기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서 사실을 알려야 할지 엄두가 안 났다. 내가 그 역할을 맡겠다고 자원을 해도 형수의 허락이 안 떨어졌다.
그 동안 침묵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리던 남편의 말이다. "사람이 한 번 왔다가 가는 것은 다 똑같지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알고 가는 것이 중요하잖아...." 엄연히 확실한 길이 있는데 알기를 거부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모르니까 거부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알고 나면 기뻐서 실행한다. 그 방법을 먼저 배운 우리의 입장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형님께 그 길을 알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전문가가 아니다. 형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말씀 드리는데도 나중에 하시겠다고 건성 대답이시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우리도 나중에 하고 싶지요. 나중에 언제요? 기운 다 빠져 운신도 못하게 되는 그때요?"
결국 사명감을 절감하며 내가 물꼬를 튼 셈이다. 하나님 소개하는데 전문가인 이 상구 박사 쎄미나에 가시도록 등을 떠밀었다. 그것도 아주 쎄게. 그 분의 강의라면 어떤 거부감도 없이 자연스럽게 하나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과학적 근거를 성경 말씀에 대입해서 신체조직의 변화를 설명하면 누구나 쉽게 알아듣게 된다. 암에 걸린 과정과, 치료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깨닫고 너무 기뻐서, 고맙다고 형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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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기제

전화 내용은 육체적인 치료에 관한 일로 그치지 않았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떻게 어떤 이유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셨는지는 묻지 않았다. 누구든지 자신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만의 비밀이다. 내가 하나님을 만난 방법이 내 남편에겐 아무 감동도 변화도 주지 못했던 사실을 난 기억하고 있다.
지난 팔 개월을 보내며 희망과 확신이 우리를 포옹했다. 온전히 하나님을 알고 예수 안에서 형님의 남은 생이 정리 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했다 반복되는 어려운 투병생활 중에도 꾸준히 기도하는 형님의 모습이 지켜보는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 온 식구가 한 마음으로 감사 기도 드리고 아픔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길지 않은 믿음의 시간들을 접어야 할 순간이 형님께 가까워온다. 그러한 병상의 형님을 다시 한 번 뵙고자 서울행을 결심했는데 돌아오는 자리가 없단다. 사업체를 비울 수도 맡길 수도 없는 형편이라 주말을 이용한 서울행이다. 월요일엔 확실하게 출근을 해야하는 사정이 안타깝기만 한 남편의 심경이 오죽하랴. 혹시 돌아오지 못한다면? 한번쯤 해볼만한 질문인데 우린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지금 형님은 우리를 꼭 다시 만날 수 있는 확신을 얻고 떠날 차비를 하신다. 남편도 어렵게 자리를 받았다. 새벽에 도착해서 같은 날 저녁에 서울을 떠나 돌아와야 하는 남편에게 휘몰아친 의심의 구름이 보인다. 순간이나마 우리의 약한 믿음이 우리를 흔들지만 그래도 우리에겐 방법이 있다. 무서울 때, 불안할 때 기도로서 대신하자. 급한 맘에 미처 드리지 못했던 기도. 그래도 돌아올 수 있는 자리를 허락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니까 마음 푹 놓고 형님과의 마지막 시간을 만끽하고 돌아올 것을 남편에게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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