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 세 마리 말

2003.02.24 02:29

노기제 조회 수:761 추천:72

111601 그림 속의 세 마리 말
노 기제
이민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밀어내고 서울에서 부산정도에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비행기를 탔던 1973년 7월 19일. 3층에 친구가 살고있는 같은 아파트 2층에다 방을 정했을 때 첫눈에 나를 휘어잡은 것이 있었다. 서쪽 벽에 걸린 유화 한 점이다. 끝간데 없는 광활한 광야에 활기차게 도약하는 세 마리 말의 그림이다. 그 때 나는 보았다. 나의 미국 생활이 저 세 마리 말의 모습처럼 막히는 것 없이 시원스레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며 분명하게 펼쳐지는 장면들을.
그렇게 시작한 말을 향한 나의 은근한 미신은 이사할 때 그 유화 한 점을 훔쳐오고 싶다는 엉뚱한 발상을 주기까지 했다. 그 그림속 세 마리 말을 두고 떠나면 금방이라도 나의 모든 평탄한 미래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까지 갖고 좀더 쾌적한 아파트로 옮겼다. 그러나 곧 말 그림을 향한 나의 미련은 없어졌다. 모든 가구가 준비되었던 단 칸 방에서 거실과 침실이 따로 있는 깨끗한 아파트에 내가 직접 가구를 사들이고 꾸미기에 바빠진 것이 이유였으리라. 형편상 말 그림은 장만하지 못했다.
언제나 새해가 되면 뭔가 좀 다른 것들이 내 앞에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기대에 부응하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러나 이천 이년이란 숫자의 이번 새해는 분명 내게 획기적인 사건이 있어야 한다. 있을 것이다. 그 기초를 나는 다졌지 않은가. 여름내 뙤약볕 아래서 땀흘려 일한 농부가 가을이 되면 그 흘린 땀의 결실을 아무 의심 없이 거두어들이듯, 그런 결실을 새해 아침에 기대해본다.
이렇게 강한 열망을 갖고 기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림 속의 활기찬 세 마리 말들에게 막연한 희망을 품었던 그 시절이 달리고 달려 임오년 말의 해가 바로 새해가 된 이천 이년 금년이다. 그 동안 분명 말의 해는 찾아 왔었을 터인데 얼마나 살기 바빴으면 인지하지도 못하고 지나가게 했을까. 아니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띠의 해를 기다릴 것도 특별히 인지할 만한 이유가 없었음이리라. 십 이년마다 돌아오는 같은 띠의 해를 두 번씩이나 지나치고도 거의 반을 지내고 있는 이민 29년째인 지금에서야 왜 하필이면 말, 말의 해라고 호들갑을 떠는가. 갑작스레 옛날 그 싱글 아파트에 걸렸던 그림 속의 세 마리 말들이 어떤 초능력을 발휘하여 나에게 행운을 가져다 줄 것이란 착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아닐 것이다. 무조건 힘차게 뛰어 오를 수 있는 말의 본성을 마치 나만을 위한 능력시도의 기적이라도 베풀 듯한 영물로 여김은 부당하다. 나는 말띠도 아니다. 도무지 말이 내게 신통력 있는 일을 행할 것이란 기대자체가 아무 근거도 없는 발상이다. 그래도 나는 금년이 말의 해이기 때문에 여태껏 숨고 움츠렸던 행운들이 하나씩 고개를 들고 나를 찾아 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만큼 난 터를 닦고 주춧돌을 놓고 열심히 갈았다. 그 열매를 따려는 몸짓이 말의 해와 맞아 떨어 졌다. 막연한 기대감이 돌연 현실로 다가오면서 서둘고 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도약하는 해. 확실한 글쟁이가 되고 싶은 해. 나 스스로가 감동하고 나 자신이 읽어서 행복해지는 글을 쓸 수 있는 해. 바로 이 욕심 때문에 난 다가온
임오년 말의 해를 그냥 보내지 않을 것이다.





2
언제 어디서나 늠름한 몸짓의 말을 대할 때마다 난 생활인으로의 나의 모습인양 가슴을 펴곤 했다. 사람과 환경 앞에 움츠리지 않고 항상 떳떳한 생활인. 먹과 붓으로 그려진 동양화에서의 말이나, 유화로 그려진 서양화에서의 말이나, 사진으로 찍혀진 말의 모습, 어디에서건 나를 잠시 돌아보게 하는 말의 말없는 힘. 맑은 호수를 숨긴 눈에서 솟는 힘일까. 그 눈을 보기만 해도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듬직하고 의젓한 모습은 항상 내게 좋은 일이 있을 징조로 생각되곤 한다.
그 당시, 내 나라가 너무 좁아서 살기 힘들다고 넓은 땅을 선택한 이민의 형태를 단지 가벼운 여행으로 생각했던 진짜 이유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 첫 눈에 다가오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두려움을 떨치고자 가까운 도시로 여행가는 행위로 위장하고 마음을 다스린 후 겁 없이 도약을 꿈꾸었던 모양이다. 그 첫 순간에 내게 자신감과 희망을 주었던 그림 속의 세 마리 뛰어오른 말의 모습처럼 내 이민생활은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이천 이년 임오년 말의 해 금년에는 그 도약의 확실한 열매를 기대한다. 아직도 난 겁 없이, 불편 없이, 낯설지 않은 이 땅을 여행하듯이 살고 있다.







112001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340 삼종경기 file 노기제 2003.02.02 801
339 내게도 조국이 file 노기제 2003.02.02 504
338 최면 이야기 file 노기제 2003.02.02 532
337 승마장 가는길 노기제 2003.02.02 611
336 쌈 다시마 노기제 2003.02.02 658
335 완전히 개판 노기제 2003.02.16 506
334 김치 볶음밥 노기제 2003.02.16 673
333 그가 잠시 비운자리 노기제 2003.02.16 733
332 미워진 남편 노기제 2003.02.16 577
331 악몽 노기제 2003.02.16 500
330 사후준비 노기제 2003.02.16 564
329 예쁜마음 가꾸기 노기제 2003.02.16 463
328 시퍼렇게 멍든 첫사랑 노기제 2003.02.16 765
327 가을앓이 치료법 노기제 2003.02.16 629
326 황혼의 데이트 노기제 2003.02.16 619
325 신발을 믿어 노기제 2003.02.16 770
324 돌아올 수 있는 자리 노기제 2003.02.16 507
323 교차로 노기제 2003.02.16 788
322 수상스키 준비장 노기제 2003.02.16 649
» 그림속 세 마리 말 노기제 2003.02.24 761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3
전체:
96,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