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준비

2003.02.16 03:39

노기제 조회 수:564 추천:82

081601 사후 준비
노 기제
엑스레이 사진기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신여사는 한 번도 직장을 구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며 미국생활 20년을 맞는다. K 자동차 디자이너로 잘 나가는 남편의 풍족한 수입이 신 여사로 하여금 있는 기술 다 썩히고 남매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게 했다. 아들아이가 수재로 인정받아서 특별한 교육을 시키느라 남달리 학비가 많이 들어도 남편의 수입은 모든 것을 충족 시켰다. 큰 변동만 없어 준다면 이대로 천국인들 못 가겠는가.
한국에 IMF가 터지고 미국에 있던 지사를 철수하는 회사 경영 문제로 신 여사의 남편은 한국의 본사로 발령이 나고 신 여사는 남매를 데리고 미국생활을 계속 하지만 경제적 상황은 별 변동 없이 한국과 미국에서 두 집 살림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생활 20년에 모든 습관과 체질이 바뀐 신 여사의 남편은 한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근무 시간의 불확실성, 주말에도 수시로 출근해야 하는 악습과 실랑이를 벌인다. 미국의 주말 이틀 중에 하루는 교회, 하루는 자기시간을 갖고 다음 주를 위한 재충전의 시간으로 활용하고 살았으니 어느 하루도 양보할 수 없는 날이다.
상관이 두 사람뿐인 꾀 높은 지위가 이럴 때 힘을 쓰지 못하고 전체라는 동아리 안으로 밀려서 생활 방식을 바꿔야 했던 것이 신 여사의 남편으로 하여금 그 좋은 직장에서 뛰쳐나오게 했다. 다시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찾은 일이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전문학교에 교수직이다. 물론 수입은 전직과 비교할 수 없는 박봉이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시간이 흐를수록 신 여사는 초조해졌다. 펑펑 벌던 남편이 자신의 용돈만 겨우 챙겨오는 실정에서 있는 돈 까먹기란 피를 말리는 상황이 되었다. 철없는 아들아이는 돈 찍어내던 아빠가 갑자기 고장난 기계인양 작업을 중단함에 울분을 터트린다.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회사를 그만 두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제법 매섭게 질책이다. 중간에서 신 여사는 난감해졌다. 아이가 가진 아빠의 역할을 바르게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기가 필요한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아빠의 임무라고 생각하는 뻔뻔한 자식놈과 그 소리에 황당해하는 남편을 다독거려야 한다.
결국 자신이 일을 찾아 나선다. 자격증, 말이 좋아 자격증 소유자다. 나이는 40대 중반에 경험은 전무이니 어느 병원에서 일자리를 줄 것인가. 여기저기 제출한 이력서에 회답이 오기를 기다리며 일 년이 후딱 지났다. 안되겠다. 한 푼이라도 벌어서 보태야 한다. 아무거나 하자. 급해진 마음에 신문 광고에서 모집한다는 판매 담당사원에 응모한다.
이렇게 해서 신 여사는 묘지 판매원이 됐다. 우리가 이민 올 당시 장례비용은 2천불이면 충분했지만 20년 지난 요즘은 2만 불이 든다. 그러나 앞으로 20년을 살지 30년을 살지 알 수는 없지만 죽어서 그렇게 많은 돈이 든다면 정말 큰 일이다. 신 여사 말대로 지금이라도 묘 자리를 사서 월부로 갚아 나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이 문제를 예전에 벌써 의논하고 결정한 바가 있다.
죽어서 땅에 묻히고 묘비를 세워 놓아도 누구 하나 찾아 줄 사람이 우리 부부에겐 없다. 살다가 어디에서 죽을지도 모르는데 묘지만 덜컹 여기다 사 놓으면 그것 또한 낭패다.
신 여사의 열성에 어떻게 해서든지 돕고 싶은데 남편의 의견도 나의 의견도 우리는 묘지를 쓰지 말자고 합의를 했다. 건강하게 몸 관리 잘 하면서 살다가, 죽으면 장기 기증하고 시체는 공부하는 사람들 해부할 때 쓰라고 기증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처음엔 신 여사도 그렇담 묘지는 필요 없겠다고 동의를 했다.
2


신 여사에게 도움이 되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었다. 일 주일 후 다시 만났을 때 신 여사가 음성을 높여 내게 경고를 한다. "안 받아요. 안 받아. 늙은 사람 장기 어디다 쓴다고 받아요. 시체도 넘쳐 나서 늙은 사람 것은 안 받는데요."
듣고 보니 그럴 듯한 얘기다. 장기기증이란 것도 운전면허 시험 볼 때 서명 한 것이니 만약 사고로 죽었을 때 즉 젊어서 죽었을 때라야 장기도 필요한 모양이다. 내가 듣기로는 요즘 의대생들이 시체가 모자라서 해부도 충분히 못한다고 했는데 신 여사 얘기로는 시체가 너무 밀려있다고 하니 그러면 우리 부부 다시 의논해야 하겠다.
신 여사가 알려 준 정보가 정확하다면 쉽게 생각했던 사후 준비가 처음부터 다시 계획되어야 하겠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렇다고 장기가 아직 쓸만하니 지금 죽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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