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살 맛 난다

2014.04.14 04:22

노기제 조회 수:459 추천:77





20140213                  요즘 살 맛 난다

        특별한 어려움 없이 항상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끔은 살맛이 안 난다고 불평을 하곤 한다. 뭔가 나를 자극시켜 줄 일은 없을까. 아니면 복권이라도 한 번 맞아 준다면 삶에 대한 열정이 확 살아 날 텐데.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면 좋겠다. 날마다 똑같은 사람 마주하며 근근이 살고 있는 이 생활패턴을 좀 바꿔 보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은근히 일탈을 꿈꾸다 화들짝 놀라기도 한다.
        
         우연히 듣게 된 자신의 지난 날 속의 한 장면. 분명 그 장소 그 일, 기억은 선명한데, 그 곳에 있었던 사람을 기억할 수 없다. 그런데 그 곳에 있었던 한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 멋진 모습으로 기억하며 한 번 만나고 싶다는 전언을 들었을 때, 가슴은 갑자기 쿵쾅쿵쾅 속도를 측정 할 수 없이 빨라지고, 얼굴까지 빨개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사랑이란 따사한 감정이 부스스 기지개를 켜는 모양이다.

        동창생들이 모여 단발머리 시절의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다 아 그 선배? 아무개가 좋아했다더라. 우리보다 2년 선배다. 어느 날, 대학생이 된 그 선배가 후배들 동아리 모임에 나타났었단다. 합창 연습을 지도하러 왔던, 핸섬한 얼굴에  옷도 잘 입은 부유한 집 도련님의 멋진 모습이었지. 그뿐인가. 익숙한 피아노 실력.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 반주자에게 악보를 청하던 특별한 관심. 전화 통화를 하고, 악보를 구하고, 그 선배가 집 근처까지 찾아 와 악보를 건네곤 했던 숨겨 진 추억.

        50여년이 지난 오늘, 난 두 사람 중간에서 그들의 맑고 곱던 한 순간을 연결 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먼저, 같은 미국 땅 엘에이에 살고 있는 선배를 만나 옛 일을 기억하도록 말을 걸었다. 처음엔, 그 선배가 나를 잘 모르는 상황이라 내 소개부터 했다. 이어서 옛 일을 얘기하며 뭔가 기억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기대했던 설레는 대답 대신에 가슴이 아려오는 말. 사실은 내가 2006년에 뇌출혈로 죽었다 살아났거든. 그래서 아주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게 됐어. 혹시 기억 될 수 있을지 모르니 그 후배에게 자세히 좀 얘기 해 보라고 부탁 좀 해 볼래?

        아주 작은 것 하나라도 기억 해 내고 싶어 하는 선배 요청으로 당사자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친구는 한국에 산다. 뭔가 선배가 듣고 기억을 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얻기 위해서다. 그 당시, 선배가 나타나면 합창을 위해 모인 여학생들은 일제히 긴장 하는 분위기였단다. 선배의 멋진 모습에 모두 빠져드는 현상이란다. 그러나 선배는 피아노의자에 앉은 자기 곁에 항상 걸터앉아, 반주자인 자기에게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가끔은 새 악보를 불쑥 내밀며 쳐 보라고 요구하기도 했으니, 여학생의 입장에선 그 선배가 자신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다가왔다고  느꼈다는 거다.

        설레는 마음에 좀 더 확실한 표현을 기대하기도 했었지만 별 진전 없이 각자 주어진 삶을 살아 온 50여 년이다. 바람결에 들린 선배 소식에 떨림 있는 속내를 보인 친구는 생생하게 기억나는 지난 일을 설득력 있게 내게 말하며 선배가 어느 정도로 기억하고 있는지 넌즈시 알아보라 부탁한다.

        두 사람 얘기를 듣고 양쪽에다 전하고 보니, 시시한 결론이 내려졌다. 내 친구가 기대했던 설레는 감정을 선배를 통해서 들을 수 없다. 다 지워졌다는데 무었을 자꾸 캐어묻겠나. 싱겁게 툭 던지는 빠른 반응은 반주자니까 악보를 주고 받고 그랬다는 평범한 대답이다. 그러면서도 뭔가 특별한 사건을 기대하는 질문을 던진다. 그 애는 어떻게 변했느냐, 늙었느냐, 아직도 내게 관심이 있느냐며 멋쩍은 웃음을 흘린다.

        좀 더 애틋한 기억들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중간에 나선 내가 안타깝다. 겉으로 보기엔 건강상 문제가 전혀 안 보이는 선배를 마구 흔들어 옛일을 기억 해 내라고 다그치고 싶다. 그래서 친구가 듣고자 하는 대답을 얻어 내어 전해 주면 좋겠다. 아주 작은 말 한마디로 진부한 삶이 반짝 햇살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감히 누가 이런 감정의 일탈을 정죄할 수 있을까
.
        사실을 전해 주었음에도 친구는 밝게 웃으며 언젠가 한국에 나오시면, 꼭 선배의 전화를 직접 받고 싶어 한다고 전하란다. 얼굴을 마주하고 옛일을 얘기 하면 혹시 기억나게 될지도 모르지 않느냐며. 한 편 미국의 선배는 선배대로 나를 볼 때마다 환하게 웃으며 요즘 정말 살 맛 난다며 즐거운 비명이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밝아진다.

        선배와 내 친구와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잠시라도 이렇듯 맑은 행복에 젖을 수 있음을 큰소리로 세상에 자랑하고 싶어 졌다. 오래 간직 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살맛나는 세상에 한 번 푹 빠져 보는 경험을 주선 해 주는 중간 역할이 죄 된 행동이라고 감히 누가 나를 나무랄 것인가.

        세월에 장사 없다는 속담대로 우린 정말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래서 풋풋한 감정도 되살리기 힘들다. 할 수만 있다면 그 때 그 예뻣 던 마음을 다시 느끼고 싶다. 내 주위 친구들에게도 그 고운 감성을 다시 찾게 해 주고 싶다.
        
                                                      201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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