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줍은 미소

2013.12.21 08:48

노기제 조회 수:554 추천:108

                         그녀의 수줍은 미소
                                                                                                      노기제
   메리 앤의 방 문 기둥엔  퀼트작업으로 만들어진 갈색머리 소녀의 얼굴이 걸려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내 방으로 가는 복도를 들어서면서 바로 눈에 띈다. 사각형으로 지어진 아파트의 남북선상 북쪽으로 창이 난 끝방 이다. 그녀의 문에 걸린 갈색머리 소녀를 보며 우회전 하면 동서선상 첫 방이 내 작업실이다.    
   아파트 입주자들은 각양각색이다. 백인, 흑인, 아시안,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인종 등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단면이다. 아파트는 호텔 기능을 갖추어 가구 포함, 청소는 매주 화요일에 수건들과 침구 카버들이 깨끗한 것들로 바뀐다.  호텔이니 전기세, 수도세, 기본 전화요금 들은 모두 월세에 포함되어서 따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무슨 이유에선지 머릿속 가득한 글감들을 토해내지 못한지 일 년이 넘었다. 답답하다. 환경을 바꿔 보면 어떨까 싶어 혼자 있을 공간을 마련하고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공간에서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복도에서 자주 마주치는 그녀에게 살갑게 다가간 건 물론 나였다.

   아무리 친근하게 말을 건네도 돌아오는 반응은 언제나 짤막한 대답에 아주 엷게 비치는 미소뿐이다.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 라는 느낌을 준다. 갈색인 듯한 털로 짠 베레모가 암 환자라는 팻말로 보인다. 회복한 환자이길 바래 본다. 아직은 여름날씨 같은 엘에이의 9월에 털모자란 달리 해석이 안 된다.

   날이 가면서 그녀와 마주치는 횟수가 잦아지지만, 더는 안돼. 거기서 멈춰. 말 시키지 마. 경계심은 안 느껴지는데 수줍어 피하는 소녀로만 보인다. 그러다 각종 구슬들 사용해서 목걸이, 팔찌 등을 만드는, 아파트 단지에 있는 클래스에서 만났다. 여전히 말 수는 적지만 나름대로 열심이다. 슬쩍 어깨를 토닥여 주며 인사를 건네 본다. 똑같은 반응이다. 나이를 짐작 해 본다. 이 아파트의 입주자라면 육십 이세가 된 노인이어야 하니 그 정도는 됐겠지.
   그러다 아주 운 좋은 날, 그녀를 아파트내 미장원에서 만났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얼떨결에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모자 벗은 그녀의 백발을 보았다. 적당히 길러진 머리. 귀 밑부터 약간 정리가 필요하니 많이 자르지는 말라는 그녀의 말소리가 곱고 잔잔하다. 내가 참견을 한다. 아주 예쁘네. 길지 않은데 자르지 말지. 더구나 모자 벗은 모습이 아름답다. 수줍은 듯 살짝 비치는 미소와 머리가 아주 잘 어울린다. 머리 부스러기가 많으니 아예 머리를 여기서 감고 가지 그러니. 뒷거울 좀 볼래? 진짜 예쁘거든.

   내 수다에 간간히 웃어 보이면서도 말 끝마다 나와야 할 대답은 아낀다. 다음 약속이 있어서 그냥 가겠다며 일어서 나간다. 처음으로 그녀를 향해 많은 말을 할 수 있었던 게 나를 기쁘게 했다. 그녀는 지금 현재 암환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두 달 전 이었다.

   며칠 전 화요일, 청소부들이 바쁘게 오가는 복도에서 휠체어에 앉아 그녀의 방 앞을 서성이는 테라를 만났다. 혹시 나도 그녀를 만날 수 있겠다 싶어 다가 가서 무슨 일이냐 물었다. 테라가 카드 두 장을 건넨다. 지금 메리 앤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빨리 회복하라는 카드와 내일 60세 생일을 맞는 그녀의 생일 카드란다. 원하면 몇 자 쓰란다. 자기는 그녀의 방 열쇠를 맡고 있어서, 청소부들에게 그녀의 방을 청소 시키려고 기다리는 중이란다.
  
   아니 왜? 난소암이 간으로 전이 되고 복수가 차서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됐단다. 아아 싫다. 보기엔 전혀 아픔이 없었다. 신비하리만큼 절제된 그녀의 미소가 그렇게 큰 통증을 담고 있었단 말인가? 그동안, 그녀가 그런 아픔으로 고통중에 있을 때, 난 뭐하고 있었나? 안일하게 헛소리만 늘어놓으며 그녀를 웃겨보려 했던 건, 단순한 농 짓거리 였을 뿐. 그녀의 심각한 상황에 진실한 한 방울 위로가 되지 못했으니 이걸 어쩌면 좋을가. 하느님 나 어떻게 해요? 쓰잘 때 없는 내 눈물이 카드위에 한 방울 툭.
  
   온 맘을 다해 회복을 기원하며 위로의 말을 쓴다. 진심이 아닐 것 같은 기분으로 생일 축하의 글을 쓴다. 내 속은 온통 불안감으로 시끄럽다. 자신이 없다. 내가 끄적이는 이 기원의 말들이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방정맞은 예감에 몸이 떨린다. 화요일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 있는 전단지. 장례일정이다. 가족이 없으니 누구나 참석할 수 있단다. 토요일 새벽 3시 경, 모든 고통에서 해방 된 그녀. 여전히 눈에 띄는 그녀 문기둥에 있는 갈색머리 얼굴 인형. 그녀와 똑같은 미소로 나를 보는 인형 얼굴.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201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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