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삭, 황금휴가

2009.07.02 03:38

노기제 조회 수:702 추천:159

20090624               폭삭, 황금 휴가

        참 오랫만이다. 스키여행이 아닌, 산행이 아닌, 그냥 휴식을 위한 휴가를 계획한 것이. 남편이 보고 싶어 하는 일본으로 갈까. 유럽으로 떠날까. 2주 내내 따뜻한 바닷물에서 윈드써핑을 하며 충분히 쉴 수 있는 지중해 어디론가 갈까.
        
        6월 중순인데 일본은 벌써 우기에 접어 들었고, 돼지 독감이 고개 들고 코를 벌름대니, 조용히 미국에서 지내자고 마음을 모았다. 관광회사로 방향을 틀었다. 시간 있는 내가 우리 휴가의 방향대로 관광 상품을 정하고 여기 저기 맞는 상품을 찾아 전화 걸기가 시작 됐다.

        일 접고 집에 있은지 오래 된 나는 날마다가 휴가이니 그리 흥분 할 것도 기뻐할 일도 아니지만, 못된 동창에게 속아, 하던 약국 날리고 늦은 나이에 다시 일하러 다니는 남편에겐 정말 황금 휴가 그 자체인 셈이다. 더구나 산꾼인 남편이 산행을 미루고 아내인 나를 위해 특별히 함께 하려는 관광여행이니 고마운 마음까지 더하면 황황금금 휴가가 아닌가.

        신문에 난 광고를 보며 전화를 하고, 광고는 나갔지만 그 상품은 요즘 못 한다는 말에 실망하기를 세 번. 관광지를 바꾸려는 즈음에 딴 관광회사에서 우리가 원하는 상품을 광고 했다. 전화로 신청하고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기에 다시 전화 확인을 했다. 일정을 보내달라고 했다. 걱정마시란다. 몇 명이냐니까 30명 신청했단다. 한국에서 온 손님들이냐니까 전부 미국에 사는 분들이라나. 우연히도 휴가가 같은 시기의 사람들인가 보다 했다. 며칠이 지나도 역시 연락이 없다. 다시 연락 했다. 확실히 떠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같이 가시는 분은 얼마 안 되고, 라스베가스에 가서 합류하게 된단다. 그러려니 했다.

        그야말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모처럼의 휴가다. 강아지 맡기고 돌아오는 아픈 마음도, 낯선 여행자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생각하면서 위로를 받는다. 강아지와 세 식구가 함께 사는 집에 우리 부부만 있으니 휑하니 쓸쓸하다. 왠지 기분이 산뜻하지가 않다. 꼼꼼하게 계획 한대로, 신문 배달도 중지 시켰고, 짐도 필요한 것 다 챙겨서 잘 쌌고, 옆집에 넌즛이 일러도 놨으니 걱정할 건 하나도 없는데 뭔가 좀 그런 기분이다. 남편이 자꾸 묻는다. 확실하게 했어? 가긴 가는거야? 금요일에 마지막 확인 전화 할 때, 담당자가 자신만만하게 걱정마시라며 월요일 아침 9시에 떠납니다 했으니 확실하지 뭐.

        남편의 또 다른 걱정은 큰 버스로 가야 하는데, 작은 차면 불편하고 위험하단다. 우리 보다 먼저 30명이 신청 했다고 했으니 우리 다음에도 또 있겠지 뭐. 큰 버스 일꺼야. 차멀미가 심한 난, 앞자리 잡으려면 8시엔 집에서 떠나야 한다고. 멀미에 좋은 생강사탕 챙기라며 마지막 점검이 끝났다. 차를 아예 근처 호텔 주차장에 맡기고 걸어서 관광회사로 가자는 남편 말에, 짐을 먼저 내려 놓고 차를 맡기는 것이 순서라고 그냥 관광회사 앞에 섰다.

        아침 9시에 출발 한다는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8시 반인데. 우선 사무실로 들어갔다. 직원 두 명이 보이는데 눈도 안 맞추고 인사도 없다. 입구 소파엔 여행 손님인듯한 부부가 앉아있다. 직원의 주의를 끌려고 손짓을 하고, 말을 걸어도 쳐다 보지도 않는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남편의 눈치를 보니, 벌써 씁쓸한 표정이다. 이어 여직원이 두 사람 들어서는데 성함이 어떻게 되시느냐, 예약은 하셨느냐, 어디 가시는 손님이냐……….

        여기저기 전화 해서 차편을 알아보고 있다. 다시 남편 얼굴을 봤다. 틀렸으니 가잔다. 소리 한 번 못 지르고 이게 어떤 휴간데 중얼거리며 남편 뒤를 따라 나왔다. 다행히 차를 호텔 주차장에 맡기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월요일 아침에 이게 무슨 날 벼락인가. 그리고 아무도 우릴 잡으려 하지 않는다. 거기서 기다리던 손님이 쫓아 나와 묻는다. 어디 가시는 거에요? 집에요. 관광은 안 가시구요? 어떻게 가요? 차편도 마련이 안 되서 이제 여기저기 알아보는데 어디서 묵고, 먹는 건 어떡하구요? 따라 갈수도 없는걸요. 그럼 우린 어떡해요? 집에 가셔야죠. 돈은요? 돌려 받으세요.

        누구를 향해 무슨 소릴 할 수 있겠나. 오직 하고 싶은 말은 토요일에라도 알려 주었음 강아지도 안 맡기고 하루 쯤 다시 생각 할 수도 있었을 텐데. 끝까지 어떻게 되려니 안 간 힘을 썼나 보다라고 불쌍한 마음만 든다. 이게 바로 불경기라는거구나. 광고 내고, 기다리고, 애 쓴 저 사람들이 무슨 죄 있겠나. 경기가 이런걸. 불경기 체감 못 한, 우리가 보듬어야지. 고개 푹 숙이고 눈도 맞추지 못하던 담당자에게 화가 나기 보다는 위로주라도 한 잔 사주고 싶다. 남편에겐 무지 미안하다. 내가 맡아서 중간 작업을 했으니 결과는, 내가 그르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남편이나 나나 멍하니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어서, 맡겨 논 강아지 호텔비 물고 데려 왔다.  2주나 되는 휴가를 어찌 해야 하나.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들러주시고 글 읽어 주시는 분들께 [2] 노기제 2022.12.01 42
180 몸 싸움 노기제 2010.05.26 855
179 엄마 생각 노기제 2010.05.26 721
178 사랑 해 줄께 노기제 2010.05.03 871
177 무소유의 불편함 노기제 2010.04.13 834
176 고백 노기제 2010.04.05 811
175 추억 속으로 걸어 간 친구 노기제 2010.02.06 866
174 현창이 영전에 노기제 2009.12.20 1079
173 선물을 고르며 노기제 2009.12.15 842
172 현찰 좀 넣고 다니지 노기제 2009.12.07 853
171 로맨스? 그건 불륜 노기제 2009.11.15 747
170 허공에 쓰는 편지 노기제 2009.10.11 664
169 원샷 하던 그날밤 노기제 2009.09.20 783
168 어떤 꼬인날 노기제 2009.09.01 675
167 잔소리 그리고 절약 노기제 2009.08.15 652
166 비타민 C 노기제 2009.08.03 747
165 용기 줄 수 있는 방법 노기제 2009.07.04 737
164 암이란 터널을 거의 빠져 나올 때 노기제 2009.07.02 810
» 폭삭, 황금휴가 노기제 2009.07.02 702
162 살아만 주렴 노기제 2009.06.24 744
161 처음 맛 본 이런 희열 노기제 2009.05.21 627

회원:
0
새 글:
0
등록일:
2015.03.19

오늘:
0
어제:
3
전체:
96,6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