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초상

2012.09.29 01:19

sonyongsang 조회 수:347 추천:61


                   어머니의 초상
                                                     손  용  상    

  추석이나 설날같은 명절이 다가오면 어김없이 코레일에서는 ‘귀성열차 예매시작’ 이라는 신문기사들이 지면을 장식한다. 지난 가을에도 예외가 없었다. 문득 달력을 보니 불과 명절이 한달 남짓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고국 떠나 남의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그곳 풍습을 보고 익히며 살아온지 어언 10여년,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나라 명절은 소홀히 하면서도 엉뚱하게도 미국 명절인 추수감사절만은 그나마 제법 챙겨오지 않았었나 하는 깨달음이 오니 뭔가 마음이 불편해지고 부끄러운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탓일까?
  더군다나 요즘은 전 세계를 커버하는 위성방송 덕분에 고국의 지방정부, 즉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내 고장 내 고향의 특색 있는 풍경들을 심심찮게 안방에서도 볼 수있게 되니 마침 명절이 되면 가물가물하던 옛날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나 자주 밤잠을 설치곤 한다.
그리고 그러한 밤이면 나는 영락없이 까마득한 기억 속을 더듬어 타임머신에 오르고 고향을 향해 달려간다.

그렇게 가을이 익어가는 고향 마을에 다다르면 가장 먼저 누우런 들판을 가로질러 논두렁 길을 타고 오는, 광주리에 새참을 인 동네 ‘아지매’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리곤 그녀들이 날라준 새참을 들 복판에 우뚝했던 우거진 정자나무 그늘아래 펼쳐놓고 막걸리 반주로 왁자지껄 육자배기 한 가락씩을 뽑아 젖히던 동네 ‘아재비’들의 흥겨운 얼굴들도 꿈처럼 떠오른다.

그렇게 해거름이 되어 들에서 동네로 들어가면 큰집, 작은집, 새집으로 사통팔달로 이어지던 코스모스 환하던 마을의 고샅, 그 황토 흙 깔린 길 위에 박힌 돌 뿌리 한 개, 풀 한 포기까지도 눈에 선한 내 고장 내 고향을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그 중에서도 특히 내 어머니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명절이 다가오면 늘 마음이 바쁘셨던 우리 어머니, 몇 날 며칠을 집안 아지매, 올케들, 대소가 며느님들 다 불러모아 콩기름 둘러 지글지글 전 부치고, 솔 이파리 얹어 송편 빚어 쪄내고, 파나 부추 썰어 찰 밀가루로 버무린 부침개 만들어 똘방똘방 어린 자식들 입에 넣어주시며 마냥 흐뭇한 미소 지으시던 내 어머니 !

  그 맛을 못 잊어 부엌을 기웃거리며 자꾸 한 조각만 더 달라고 조를라치면 체할라 꾸짖으시면서도 슬쩍 갓 부친 부침개 한 접시를 새로이 밀어 건네며 사랑을 나눠주시던 어머니.
그런가 하면 사랑채에선 대소가의 형님, 아우, 아재, 조카들이 한데 어울려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며 세상 돌아가는 성내(城內) 얘기에 시간 가는 줄을 모르면, 밤이 이슥토록 술을 걸러 보내시면서도 “적당히들 마셔라, 속 버리문 우짤라고!“ 진정으로 가족들을 걱정하시던 그 분, 내 어머니.

  그리고 어디 그 뿐이랴?
  그 때보다 좀 더 어린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명절 때의 어머니는 내게 참으로 두려운 존재였다. 바로 명절이면 반드시 겪어야 할 목욕탕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유난히 목욕을 싫어하던 내가 그녀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가면 나는 그날 초주검이 되곤 했었다.
  
  “인석아, 검둥개가 보문 성님카겠다. 하이고 이 누룽지 봐라.”
꾀부리며 요리조리 피하는 나를 꽉 껴안으시고는 뱃구레, 등짝이며 사타구니건 가릴 것 없이 때수건으로 박박 밀어 내 한 꺼풀을 벗겨내곤 했었다. 더구나 그 때는 세수비누가 귀해 머리를 감길 땐 빨래비누를 사용했기에, 그러면 아무리 눈을 감아도 비눗물 때문에 눈알이 따가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아, 그 때는 왜 그리 어머니가 밉고 원망스러웠는지…. 이제 다시는 사탕 몇 알, 만화책 몇 권에 엄마에게 넘어가지 않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하곤 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머리통 굵어가면서 세속에 휩쓸리다가 어느 해인가 한 자락 인생 실패를 견디지 못해 당신을 찾았을 때 암말 없이 머리를 감싸며 어깨를 다독여 주시던 어머니 !  백마디 말보다 그 따듯한 손 두드림 한 번에 그냥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던 기억들…… 당신인들 멍든 가슴으로 얼굴마저 꺼멓게 타 들어간 자식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을까.

  아아, 그 아픔을 번연히 알면서도 살가운 위로 한마디 못 해드린 채 당신이 돌아가시자 마자 훌쩍 도망치듯 이민선을 타버린 불효 자식을  어머니는 용서하실 수 있을는지….. 그러나 이제 아무리 천만금을 얻어 어머니를 무등 태우고 싶어도 지금 그 분은 내 곁에 없다.

  “애비야. 사람은 뿌리가 굳건해야 한다. 어디를 댕기더라도 나중에 객지 귀신은 되지 말거라.”

  병원에 혼자 계실 땐 얼마나 외로워셨을까. 그러면서도 임종하시기 얼마 전, 유난히 몸을 정갈하게 하시고 나를 불러 정색을 하며 한 말씀이 지금도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다 아직도 만리이역을 헤매며 뿌리를 못 내리고 있으니 이를 어쩌나… 어떨 땐 나중엔 차라리 객지귀신이 될지언정 우선은 무작정 달려가 아직까지 당신이 잠든 산소 한 번을 제대로 찾아 뵙지 못한 불효의 한(恨)부터 풀어드려야 할텐테…… 하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아아, 언제나 그럴 수 있을지 마냥 죄스러운 마음만 가득하다.

  이제 곧 명절이 다가온다,
  지금부터 달포 남짓이나 남았다고 한다. 이왕 미리 알아버린 명절 날이니만큼 나로서는 고국으로 건너가 고향으로 가는 기차표 예약은 못하더라도 이번 다가오는 추석엔 비록 이 나라 명절이 아니라 할지라도 미리미리 준비를 좀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 잊고 지냈던 축(祝)과 지방(紙榜)쓰는 법도 새로이 챙겨보고, 더불어 가물가물했던 차례상 음식도 내용을 검색해보았다.

  새삼스레 심란해 하는 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이제는 다 큰 막내딸이 어릴 적 먹었던 명절 음식이 새삼 그립다고 하는 것을 보니, 약소하게나마 음식들도 정성껏 장만하여 잊고 지냈던 그 맛과 내 뿌리를 찾아야겠다. 그래서 차례상을 차린 다음, 조상님들께 우리 고유의 방식대로 제례를 올리고 사진도 찍어 남김으로써 후일 아이들에[게 그나마 아비가 ‘돌상놈’은 아니었다는 변명의 구실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 날자에 맞춰 어머니에게는 별도로 편지 한 장을 써서 그 분의 유택으로 부칠 생각이다.

  곧 명절이 다가오니 미리미리 고향가는 귀성표를 사두라는 그 신문의 기사 한 줄이 잊고 있던 어머니를 일깨우며 새삼 가슴에 못이 박히는 아릿한 슬픔으로 번져 오기에, 비록 어머니가 그 편지를 받으실 수 없다 할지라도 묘소 관리인이 그 것을 받아 당신의 봉분 앞에서 내 대신 절을 올리고 소지(焼紙)라도 할 수 있다면…… 혹시 내 애틋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어머니께 전달되지 않을까? 참 황당한 생각일지 모르지만 나는 꼭 그렇게 할 생각이다.

  명절이 온다니 더욱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라 손 끝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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