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증앙시조백일장 당선작

2016.02.27 09:09

동아줄 김태수 조회 수:108

[2015 중앙시조백일장 당선작] 권경주 외

 

■중앙시조백일장 1월 장원 당선작

 

축제 / 권경주

 

 

잎 다 진 청단풍이 차양 친 친정집에
흉허물 덮어가며 시누올케 분주한데
새 얘기 묵은 얘기로 김치 속을 박는다.

 

짓다 만 새집 위에 참새 떼 입 보태고
할머니 초상화도 웃으며 걸어 나와
빨갛게 손을 비비며 한나절 허리 편다.

 

울엄마 팔순 앞둔 주름꽃도 삭혀 넣고
몇 송이 눈발 섞어 호호 부는 해거름을
여남은 글뚝새끼리 무어라고 쪼아댄다.

 

 

 

 

이달의 심사평

 

을미년 새해 첫 달, 그 어느 때보다 응모작이 풍성했다. 신춘문예 응모작인가 싶을 정도로 수준도 높았다. 그런데 3수 이하 작품보다는 4수 이상으로 호흡이 긴 작품이 많았다. 4수 이상의 긴 작품의 경우 시조 형식에 맞춰 잘 다듬어지긴 했지만 시적 감동은 상대적으로 약했다.

시조는 형식적으로 압축이, 내용적으로는 감동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3장6구의 작은 몸체지만 내용적으로 엄청난 시적 감동의 폭발력을 지닐 때 좋은 시조가 될 수 있다.

시조 형식에 맞추어 길게 쓴다고 좋은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시마저 짧은 시를 지향하며 긴 글을 읽지 않으려는 스마트폰 시대 독자들을 감동시키려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본령이 짧은 시인 시조가 오히려 길어져서야 되겠는가.

 이러한 관점으로 응모작품을 읽으니 비교적 어깨에 힘을 빼고 쓴 작품들이 우수작의 범주에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권경주의 ‘축제’가 윗자리에 놓였다. 시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의 적정성에다 내용 또한 어려운 부분 한 곳 없이 전체가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졌다. 온 가족이 김장을 담그는 체험 속에서 우려낸 장면 장면들은 잔잔한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여기저기서 구절들을 떼다 붙인 작위적인 작품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차상으로 뽑은 이기선의 ‘벽시계’ 또한 다르지 않았다. 언제 멈췄는지 알 수 없는 고향집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에 대한 신선한 발견이 정서를 자극한다. ‘굶어 죽’었다는 종장의 구절에 오면 오늘 이 시대 독거노인의 죽음까지를 연상하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차하로 뽑은 ‘겨울, 칸타빌레’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감각적인 시편이다. 이런 현대적 감각을 키울 때 독자에게 읽는 기쁨을 안겨주는 좋은 시조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응모자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권갑하·박권숙(대표집필 권갑하)

 

 

 

 

 

■중앙시조백일장 2월 장원 당선작

 

아내, 활을 쏘다 / 이종현

 

 

연애할 때
내 화살
과녁으로 받아주고
빈 잔의
삽십 년을
웃음 살풋 채워주던,
아내가
시위를 당긴다
자음모음 날이 서다

 

 

 


이달의 심사평

 

시조작품의 뿌리는 율격이며, 탁월한 상상력은 그 꽃이다. 3장6구 12음보의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엄격한 리듬규칙이 현대시조의 근간이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외적 세계를 받아들이고 작품 내에서 그 변용된 체험을 질서화하여 재창조를 가능케 하는 상상력이 바로 현대시조의 생명력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달의 응모작품들은 질과 양 모두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기계적인 자수 맞춤에 급급하거나, 자의적인 율격파괴나 변형으로 벗어나 버린 작품, 개성적인 심안이 아닌 지나친 관념이나 감상으로 채워진 대다수 작품들에서는 시조에 대한 보다 간절하고 진정성 있는 사랑과 이해가 요구된다.

 먼저, 균형과 절제라는 함축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단시조 작품인 이종현의 ‘아내, 활을 쏘다’를 장원으로 뽑았다.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정형의 틀 속에 열린 진폭의 감동을 담보해내는 솜씨가 단연 돋보였다. 반려로 살아온 아내의 잔소리를 “자음모음 날이 선” 화살의 시위를 당긴다고 따뜻한 미소가 번져나게 하는 재미있는 상상력으로 풀어낸 점도 호평을 받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정형의 틀이 구속이 아니라 탄력 넘치는 긴장과 여백의 장치로 작용하고 있음이 경이롭다.

차상으로 뽑은 이상구의 ‘월곡리 청보리’는 “비탈밭 시린 세월 온몸으로 견디”는 겨울 청보리의 “푸른 꿈 붙안는” 강인한 생명의지를 형상화하여 그에 투영된 생의 의미를 성찰해낸다. 차하에 오른 정춘희의 ‘생강나무 꽃’ 역시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우는 과정을 여성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감각으로 그려내고 있다. 덧붙여 동일인이 여러 이름으로 투고하거나, 맞춤법 등이 잘못된 작품은 선외로 함을 밝혀두는 바이다.

 

심사위원 : 권갑하, 박권숙 (대표집필 박권숙)

 

 

 

 

■중앙시조백일장 3월 장원 당선작

 

사랑을 수선하다 / 정옥자

 


먼지가 밥이다 정직한 밥을 위해
맞지 않는 사랑을 늘이고 줄인다
그쳐서 되는 일이면
무엇이든 다할 듯

 

키를 넘는 일감들이 지루하게 쌓여 있고
고단한 알전구는 하품할 새도 없다
먼지는 노래가 되고
흥얼흥얼 피가 된다

 

담뱃값을 꺼내가는 실직한 남편도
하트연기 띄우며 실없이 흥 돋우고
시름은 꽃으로 핀 듯
창 없는 방, 창이 된다

 

 

 


이달의 심사평

 

본격적인 시조 창작의 계절이 시작되었다는 듯 이번 달에는 응모 편수가 평소보다 많았다. 응모 편수가 많으면 좋은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커진다. 새로운 화법, 남다른 상상력, 형식 운영의 신선함 등 뭔가 기존의 작품들과는 다른 시조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가슴이 설렌다.

 시조는 아무래도 종장의 처리 수준에 따라 우열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초장과 중장에서 펼쳐온 시상을 종장에서 나름대로 전환의 미학을 창출해야 맛이 깊어지고 감동의 파장도 커진다. 그런데 많은 작품들은 시조 종장을 자유시처럼 펼쳐 놓아 시조로서의 매력을 상실하고 독자의 눈길도 끌지 못한다.

 3월의 장원은 정옥자의 ‘사랑을 수선하다’에 돌아갔다. 이 작품은 ‘먼지’가 ‘밥’인 수선집의 독특한 분위기와 사랑의 의미를 잘 살린 작품이다. 제목만 보면 조금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둘째 수와 셋째 수의 종장이 거느린 질감으로 전체적으로 선명한 그림이 그려지면서 수선의 대상이 왜 사랑인지를 수긍하게 한다. ‘밥’이던 ‘먼지’가 어느새 ‘노래’가 되고 ‘피’가 되며 시름마저도 꽃으로 피어 ‘창 없는 방’에 ‘창이 되’어 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시선과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차상은 김진숙의 ‘양파’에 돌아갔다. 장원 작품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을 정도로 둘째 수의 종장 ‘오히려/ 당신이 왜 울어/ 원망 한마디 못하게’는 잘 뽑아 올린 명구다. 자유자재의 화법으로 술술 읽히는 맛이 일품이다.

 차하 작품은 이수자의 ‘저녁 벌교’다. 벌교의 꼬막이 소재인데, 뻘배에 한 짐 가득 싣고 돌아가는 저녁이면 경계에 나섰던 방게도 안심하고 제 집으로 돌아간다는 종장에서 생의 아릿한 안도감을 맛보게 한다.

 이들 작품 외에도 시조로서 일정 수준에 오른 작품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선명한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하고 난해의 늪에 빠진 작품들이었다. 자연 감동도 떨어졌다. 다음 달에는 더욱 좋은 작품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권갑하·박권숙(대표집필 권갑하)

 

 

 

 

■중앙시조백일장 4월 장원 당선작

 

서시 / 엄정화


 

책 한 권 여학생 둘
몇 바퀴 돌았는지

 

담벼락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인사동 필방을 지나온
기나긴 골목길

 

구름이 걸려있는
안국동에서 운니동까지

 

눈 감고 걷기만 해도
빛들이 오고 간다

 

어깨 위 은행나무 속으로
밤하늘이 떨어진다

 

 

 

 

이달의 심사평

 

이달의 장원으로 엄정화의 ‘서시’를 뽑는다. 서시는 한 시인의 자전적 시론을 보여주는 특징을 가진다. 이 작품은 청소년기를 지나 현재에 이르는, 그러나 딱히 뭐라 말할 수 없는 아득함을 노래한다. 구름의 길에서 마음의 빛을 보았고 어깨 위에 솟은 은행나무 속으로 떨어지는 밤을 만난다. 그 아득함은 주소불명의 지난날, 서울 도심의 골목길, 낮에서 밤으로 의문부호를 남기며 끝없이 변주된다. 뭐라 적시하지 않았지만 모호함 속에서 비애, 추억 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첫수 초중장의 시작이 자연스럽지 못한 점이 지적되었지만 둘째수의 매듭이 안정적이어서 장원의 영예를 안았다.
차상으로 양옥선의 ‘봄 레시피’를 선한다. 봄을 맞는 화자의 일상이 잘 드러난다. 마음의 난장 같은 텃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을 버무려 끓여내는 된장국 냄새가 구수하게 다가온다. 아쉬운 것은 음식 ‘게미’가 좀 덜하다는 점이다. 결핍이든 충만함이든 조금은 더 맛깔나게 하는 양념이 첨가되었으면 훨씬 시적 완성도가 높아졌을 것이다.

차하는 이형남의 ‘꽃’이다. 힘겨운 깔딱 고개를 넘지 못하면 명창이 되지 못한다. 아니리는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엮어나가는 소리행위다. 그 아니리의 자유자재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단수 속에 녹여내고자 하는 열망이 선자의 눈길을 끌었다. 이밖에도 이누리·윤가람·이정란·안창섭의 작품도 끝까지 고심하게 했다.

4월 응모 작품들은 왠지 지쳐 보인다. 시조를 향한 열정과 오롯한 가작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아쉽다. 복잡한 우리 시대의 얘기를 정형율격에 담는 일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법칙과 규율로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던가. 그 제약 속에서 자유를 얻어 가는 것이 시조의 묘미다. 무릎을 치는 한 수를 기다린다. 응모한 모든 분의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이달균·박명숙(대표집필 이달균)

 

 

 


■중앙시조백일장 5월 장원 당선작

 

스마트폰 감옥 / 윤애라

 


나의 수인 번호는 끝자리가 **48
길을 잃은 내 이름을 누가 와서 불러주면
메아리 몇 겹을 두르고 침묵으로 대답하지

 

벌거벗은 비밀들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여기 수천만 개의 물음표가 떠다니네
손가락 휘어지도록 찾아가는 저 노역

 

똑똑, 노크소리 길 하나가 또 열린다
내가 나를 잊었을까 수시로 확인하지
접혔던 손금을 밟고 흘러가는 물결소리

 

누군가 손바닥의 적막을 읽고 간다
찡그린 얼굴들을 백지 위에 쏟아내면
표정과 표정 사이에 아주 잠깐 빛이 든다


 

 

 

[이달의 심사평] 휴대폰에 얽매인 일상 … 깊이있는 사유로 성찰

 

계절 덕분일까. 이번 달엔 응모편수가 많이 늘었다. 그러나 질적인 면에서는 지난달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시조라는 장르의 특성을 모른 채 응모한 작품들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스마트폰 감옥’을 장원으로 올린다. 정형의 보법을 제대로 지켜내면서 소재나 표현 면에서도 구태를 보이지 않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해 독자적 개성을 뿜어낸 기량이 돋보인다. 휴대폰에 얽매인 일상의 삶을 진단하고 성찰한 주제의식도 뚜렷하고 핸드폰을 감옥으로, 화자를 수인으로 설정한 비유에서도 녹록지 않은 사유의 깊이가 느껴진다. 함께 보내온 상당한 작품들도 당선작을 밀어 올리는 지렛대 역할을 했다.

차상으로 ‘고사목’을 선한다. 특별한 수사 없이 평범한 진술인 듯싶지만 마땅히 흠잡을 데도 없는 담백하고 깔끔한 단시조이다. 자연스러우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절제 속에서 시상을 전개시켜 나간 솜씨가 유연하다. 고사목을 통해 흙과 바람의 본질과 속성을 간파한 통찰 역시 빛난다.

차하로 뽑은 ‘이른 봄의 내재율’은 제목처럼 외형률의 틀 안에서 내재율을 풀어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어를 연결하거나 얼개를 맞추어나가는 솜씨도 좋다. ‘사람들 내려다보는,/꼼짝없는 봄 어디쯤’ 같은 표현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둘째 수에선 다소 부자연스러운 시행도 눈에 띈다. 또한 무리하게 4수를 끌어가면서 시 전체의 탄력과 긴장을 떨어뜨릴 이유가 있었을까도 싶다.

마지막까지 작품이 함께 거론되었던 류영자·윤가람·김견숙·김혜경씨에게도 정진을 부탁드리며 깊은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 이달균·박명숙(대표집필 박명숙)

 

 

 

 

■중앙시조백일장 6월 장원 당선작

 

그 곁 / 김연희

 


흰 나비 너울 날아
화들짝 고개 드니

 

파란하늘 이고 선
백목련 그 곁이다

 

하나 둘
꽃등 끄는 집

너도 곧장
그 곁이다

 

 

 


[이달의 심사평] 백목련 꽃 피고 지기까지 긴장감·음악성 잘 녹여내

 

지난해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다수의 사람들이 그 소재를 시화하여 응모했다. 이달에도 그런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그 대상이 메르스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슈가 되는 시대적 사건을 시화하지 말란 것은 아니다. 다만 시적 완성도를 갖기 위해서는 충분한 퇴고의 과정을 거친 후에 응모했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특히 습작과정에 있는 이들에게 다독이고 삭이는 발효의 시간은 꼭 필요하다. 남과 동일한 생각과 표현으론 결코 독자의 눈길을 끌지 못한다.

 이달의 장원으로 김연희의 ‘그 곁’을 뽑는다. 백목련 개화의 순간에서 처연히 지는 시간까지를 단수 속에 잘 녹여 넣었다.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그 곁’의 반복을 통해 긴장감과 음악성을 끝까지 잃지 않은 미덕이 있다. 아쉬운 점은 이미지는 얻었지만 그 너머의 사유에 닿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냥 풍경으로 남을 것이냐, 이야기가 있는 풍경이 될 것인가는 시적 본질과도 연결된다. 함께 보낸 작품들에서도 믿음을 갖게 하는데 이 점을 유념한다면 더 좋은 작품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차상엔 공화순의 ‘꽃눈개비 몸살’을 뽑았다. 4월 꽃잎의 찬란한 낙화를 꽃눈개비라는 시어를 차용한 것에 점수를 준다. 비교적 장과 구가 안정되어 있고, 시조의 맥을 아는 시인이란 믿음이 간다. ‘꽃필 땐 아프다지, 묵은 피 다 쏟아내고’ 같은 구절에서 운율을 얻은 것이 완성도를 높이는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 역시 꽃눈개비가 그저 하나의 풍경에 머물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차하는 이누리의 ‘왕골꽃’이다. 왕골꽃 줄기를 보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시대를 짐 지며 살아온 아버지의 무게를 생각한다. 자칫 상투성에 그칠 우려가 있었지만 둘째 수 종장에서 이런 우려를 불식시켰다. ‘무념의 시간’ 같은 관념어를 피했다면 더 나은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밖에도 안창섭·김양희·윤가람·송걸 등의 작품이 끝까지 논의되었다. 집중도를 높여 열심히 습작하는 흔적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우리는 언제나 무릎을 칠 한 수를 간절히 기다린다. 치열한 도전과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 이달균·박명숙(대표집필 이달균)

 

 

 


■중앙시조백일장 7월 장원 당선작

 

굴뚝 / 김갑주


 

꿈틀대는 서수필로 농묵을 듬뿍 찍어
쫙 펼친 화선지에 겨울풍경 그려간다
화제는 세필로 총총 시국을 풀어가고

 

실어증 걸린 도심 납빛의 무게만큼
할 말을 내려놓고 눈치 슬슬 보는 공단
칼보다 예리한 붓끝 목울대 파고든다

 

천 리나 떠나온 고향 인연 끊긴 시간 앞에
돌아갈 수 없는 길목 놀 한 자락 베어 물고
그리운 안부를 묻는 흘림체의 저녁 편지

 

 

 

 

[이달의 심사평] 공단의 생생한 겨울 풍경화 … 굴뚝 배경 이미지화 큰 울림

 

좋은 시조는 읽는 이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응모작에는 머리로 쓴 시조가 많았다. 시의 씨앗이 없는 것을 시조의 그릇에 가득 담아놓은 꼴이다. 또한 현대시는 이미지 묘사를 바탕으로 비유법을 적극 활용해야 관념에 빠지지 않게 되는데, 대부분 관념적 진술 방식의 시조가 많아 아쉬웠다.

 이달의 장원은 깁갑주씨의 ‘굴뚝’에 돌아갔다. 공단의 굴뚝을 배경으로 그려낸 겨울 풍경의 이미지화가 돋보인다. 공단에 대한 풍경화의 과정을 통해 ‘화제는 세필로 총총 시국을 풀어’간다거나 ‘칼보다 예리한 붓끝 목울대를 파고든다’는 진술은 큰 울림을 만든다. 공단에서 연상된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떠올리는, ‘그리운 안부를 묻는 흘림체의 저녁 편지’로의 이미지화는 빼어나다.

 차상은 조호연씨의 ‘장마’를 뽑았다. 관념적인 진술에 의존하는 4수 내외의 긴 응모작들에 비해 ‘장마’는 두 수로 짧지만 시조의 운율미를 살리면서 쉽게 풀어간 점이 점수를 얻었다. 세련된 수준은 아니지만 반복 어법으로 우리말의 맛을 살리려 한 점도 눈길을 끌었다. 차하는 서희정씨의 ‘레가토’이다. 음과 음 사이를 끊지 말고 원활하게 연주하라는 음악용어를 시화(詩化)한 것이다. 함께 보내온 작품에서도 읽히듯 독특한 상상력의 가능성이 엿보인다. 이공석씨와 고경자씨의 작품도 오랜 논의가 있었으나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백일장 응모의 경우 지정된 응모편수를 지킬 필요가 있다. 많이 보낸다 하여 가점을 얻는 것은 아니다. 또한 4수 이상의 긴 시조라 하여 심사에 유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불리할 수 있다. 짧으면서도 선명한 이미지와 시조의 율격미를 잘 살린 작품을 빚는 데 공을 들여야 한다.

 

심사위원: 권갑하·박명숙(대표집필 권갑하)

 

 

 

 

■중앙시조백일장 8월 장원 당선작

 

수화 / 김양태

 

 

온몸으로 그리는 말 샘처럼 솟아난다
손가락 끝으로 엷게 덧칠하는 몸의 말
그 손에 모국어가 사는 선 고운 춤사위다

 

허공에 수를 놓아 귀 여는 수채물감
표정으로 붓을 들어 채색하고 덧칠한다
환하게 피어오르다 번져가는 푸른 말

 

코스모스 꽃잎인 양 가녀린 동그라미
물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 지문처럼
고리에 고리를 물고 너와 나를 이어 준다

 

 

 

 

[이달의 심사평] 수화 손동작 눈에 잡힐 듯 섬세하고 선명하게 그려

 

‘수화’를 장원으로 올린다. 수화의 손동작이 가지는 둥글고 동적인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잘 살려낸 섬세하고 따뜻한 작품이다. 보이지 않는 ‘모국어’를 ‘표정’과 ‘손가락 끝’으로 ‘채색하고 덧칠’하면서 ‘물방울 지문’처럼 세상과의 소통을 그려나가는 ‘몸의 말’이 눈에 잡힐 듯이 선명한 심상으로 살아난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의 특성을 극복하며 주제를 이끌어낸 실력이 녹록지 않다. ‘온몸으로 그리는 말’이 샘물처럼 솟아 마침내 고리를 물고 세상을 이어가는 내용 전개과정도 도입에서 마무리까지 치차처럼 잘 물려 있다. ‘그 손에 모국어가 사는’ ‘표정으로 붓을 들어’ ‘환하게 피어오르다 번져가는 푸른 말’ 같은 표현들은 세련된 감성과 개성적인 터치를 돋보이게 한다. 생명공동체의 인드라망을 전하는 울림의 진폭이 크다.

 차상으로 ‘편지’를 선한다. 평범하고 낯익은 소재인데도 관념에 떨어지지 않고 구체적인 형상들을 통해 밀도를 높인 작품이다. ‘몇 달째 넘기지 못한 달력이 펄럭이고’나 ‘전하지 못한 말들 장대비가 되뇌고’ 같은 표현에서 습작의 저력이 느껴진다. 이별의 소재로 등장하는 눈물, 숯검정, 핏 노을, 밤, 낮달, 장대비 같은 하강 이미지들이 부정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표’ 아닌 ‘쉼표’ 같은 상승 이미지로 전환하려는 내적 의지도 잘 드러난다. 다만 ‘내 청춘은 아프다’ 같은 식상한 표현이 시의 긴장과 탄력을 떨어뜨린다.

 ‘가로등’을 차하로 뽑는다. ‘달빛을 세워놓고서 그림자만 검문 중’ 같은 구절이 시의 맛을 살린다. 활유적인 수사를 동원한 대상의 생명이 유기적인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둘째 수로 가면서 낱말들의 이미지 비약이 다소 심해져 첫수와의 연결이 긴밀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박한규·이중원·양늘솔씨의 작품들이 끝까지 선자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심사위원 : 권갑하·박명숙(대표집필 박명숙)

 

 

 


■중앙시조백일장 9월 장원 당선작

 

구월 / 정지윤

 

 

계절을 건너가는 새들의 발자국이
눈부신 허공에서 환승역을 만든다
철새가 밀려가는 길 출렁이며 퍼덕인다

 

발목을 적시며 걸어오는 소리들
어느새 바람은 푸른 잡담을 빠져나와
체온이 낮은 마을로 그리움을 옮긴다

 

 

 


[이달의 심사평] ‘환승역’에 빗댄 선명한 9월... 형식 운용하는 능력 돋보여

 

중앙시조백일장 연말 결전이 다가오면서 응모작도 많이 늘었다. 그러나 응모작 수에 비해 좋은 작품이 많지 않아 아쉬움이 컸다. 시조는 종장에서의 사유와 시조적 율격을 잘 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입상작으로 마지막까지 논의됐던 정진희·정미경씨 작품의 경우 시상 전개는 돋보였으나 4음보 율격에서 벗어나거나 ‘3-3-3-3’과 같은 음절 구성을 드러내 시조 형식 운용에 대한 공부가 미흡함을 노출시켜 제외됐다. 시조는 안정된 4음보 속에서 ‘3-4’ 또는 ‘3-5’와 같은 음절 변화를 통해 긴장미와 율격미를 살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달의 장원은 정지윤님의 ‘구월’이다. 계절이 9월이라서 뽑은 것은 아니다. 보내온 4편의 작품이 단수에서 다섯 수의 작품까지 수준 높은 형식 운용 능력을 보여주었고 내용적으로도 ‘구월’을 ‘환승역’에 빗대어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냈다. 첫 수 종장의 ‘출렁이며 퍼덕’이는 동적 이미지는 둘째 수 종장에서 ‘체온이 낮은 마을로 그리움을 옮긴다’로 차분히 가라앉혀 새로운 계절로의 전환을 잘 이미지화했다.

 차상은 이남성의 ‘진실로 듣고 싶은’을 뽑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진실로 듣고 싶은 말은 일본이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비는 것임을 이 시조는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눈물도 흘릴 수 없어 입 다문 하늘 이고’ 살아온 할머니들에게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차하는 최인숙의 ‘주말 부부’다. 이 작품은 주말 부부를 ‘새’로 이미지화한 것인데, 단수이지만 독자들에게 애틋한 정서를 안겨준다. 다시 강조하지만 4수, 5수의 긴 작품이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이 아니다. 3수 이내로 시상을 압축하는 절제력을 발휘해야 시적 긴장도 높은 명품의 시조를 빚을 수 있음을 다시 새겼으면 한다.

 

심사위원 : 권갑하·박명숙 (대표집필 권갑하)

 

 

 

 

■중앙시조백일장 10월 장원 당선작

 

신화를 쓰다 / 박화남


 

젖은 꿈이 잠겨있는 아득한 동굴처럼
대문을 닫아걸고 햇빛마저 걷어내고
할머닌 착한 곰으로 돌아가고 싶었을까

 

메마른 기억들을 하나 둘 지우면서
툇마루 옹이 안고 돌아누운 저 지팡이
주름살 부풀어 올라 가쁜 숨 몰아쉰다

 

바람에게 읽어주고 볼품없이 구겨진
색바란 내복 바지 꽃무늬 펄럭일 때
몰려온 여자의 가을 보풀로 날아간다

 

 

 


[이달의 심사평] 신화에서 나와 다시 신화 속으로... 할머니 삶 빗대 조곤조곤 일러줘


가을이 깊어간다. 그래서일까 이달엔 자신과 가족, 이웃을 돌아보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런 소재들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반면에 내밀한 관심과 깊은 성찰이 없으면 시적 완성도를 얻기는 쉽지 않다.

 장원으로 박화남의 ‘신화를 쓰다’를 뽑는다. 3수의 시조 속에서 장과 마디의 호흡이 안정적이다. 생의 마감을 예감하듯 할머니는 ‘메마른 기억들을 하나 둘 지우면서’ 칩거에 들어간다. 그녀도 ‘꽃무늬 펄럭’이던 한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보풀로 날아가는 낡은 가을이 되었다. 지팡이 세워두고 마실도 나가지 않는 웅크린 모습을 ‘착한 곰으로 돌아가고’ 싶은 웅녀로 표현한다. 신화에서 나와 현생에서 살다가 다시 신화 속으로 돌아가는 우리네 한 생을 조곤조곤 일러준다.

 차상으로는 이예연의 ‘초저녁별’을 선한다. 단상이지만 긴 여운을 준다. 초장에서 초저녁별의 반짝임을 ‘몸짓으로 쓰는 말’이라고 던지고, 중장에선 그것이 단풍빛깔을 닮았다고 풀어준다. 초장의 은유를 중장에서 설명함으로써 다소 결이 죽었지만 종장에서 ‘반짝, 하고 마주친’이란 파격으로 결구를 맺은 것이 선에 든 요인이 되었다.

 차하엔 김수원의 ‘아버지의 주름’이 차지했다. ‘아버지의 주름’을 ‘점자로 된 소리’로 읽은 것이 눈길을 끈다. 굵게 패인 주름살은 ‘미구(美句)’에 그은 밑줄이 아니라 지난한 생애를 보여주는 ‘수식 없는 직설’인 것이다. 다만 ‘아니라’ ‘직설이다’ ‘소리다’로 장을 종결짓고 있는데 이는 가락을 이어가지 못하게 하는 단점이 되고 있다.

 광활한 우주도 지금 여기, 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로부터 시작한다. 이는 세상 모든 이의 생각과 행위의 출발점이기에 시에서는 특별한 변별력이 필요하다. 그런 변별력에 방점을 찍어 줄 작품을 기다린다. 이 외에도 김태경·정진희·조우리·유순덕의 작품이 끝까지 논의되었다. 정진을 빈다.

 

심사위원 : 이달균·박권숙(대표집필 이달균)


 

 

 

■중앙시조백일장 11월 장원 당선작

 

겨울 배 / 유덕순

 


사나흘 내린 폭설의 밤 그늘 길게 늘인다
내려앉은 발걸음은 한걸음도 뗄 수 없어
둥둥둥 허공 맴돌며 감아드는 눈꺼풀

 

툭 툭 털고 눈을 떠봐, 귓속을 감도는 말
마음은 또 서글픈 몸을 말없이 따라가는지
잔잔한 파도를 타고 눈도 가고 꿈도 간다

 

살아갈 날 까마득해 소금기 젖은 물속의 잠
그 많은 잠 내 몸 어디 그리 깊이 고였을까
눈 감은 설원의 기도, 길 떠나는 빈 배 한 척

 


 

 

[이달의 심사평]

 

겨울의 초입, 이달에는 나름의 사유와 성찰에 주력한 작품들이 많았으나 과도한 힘이 들어가다 보니 자칫 겉도는 관념에 빠질 위험도 그만큼 높아 보인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리듬과 이미지라는 시조의 두 근간을 토대로, 공감과 감동의 폭을 넓힐 수 있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달의 장원작품으로 유순덕의 ‘겨울 배’를 올린다. 폭설 속에 정박된 선체에 자신의 인격을 투영시켜 내밀한 자의식을 읽어내는 솜씨가 돋보였다. ‘폭설의 밤’ ‘물속의 잠’ ‘설원의 기도’로 점차 심화되면서 ‘겨울 배’가 내면탐구의 ‘빈 배 한 척’으로 승화되는 마지막 수의 선명한 이미지 처리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큰 무리는 없었지만 시조의 기본 율격에 보다 더 엄격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차상 작품으로 선한 장옥경의 ‘항아리’는 지금껏 너무나 많이 다루어져서 진부할 수 있는 흔한 소재인 ‘시골집 마당가 빈 항아리’를 시적 대상으로 삼아 첫수에서는 ‘와불’이라는 회화적 이미지로, 둘째 수에서는 ‘하늘 종’이라는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신선감이 떨어지는 발상과 안이하게 처리된 상상력의 부족이 아쉬웠으나 밝고 건강한 심상과 따뜻한 시선이 큰 호감을 얻었다. 그러나 첫수 결구의 ‘와불이여’라는 영탄의 호격조사가 시적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흠으로 지적되었음을 밝힌다.

 차하 작품으로는 이중원의 ‘수중도시’가 선에 들었다. 시조의 전형인 단수시조의 절제미를 잘 살린 작품이었다. 먼저, 비 오는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을 ‘수중도시’라는 함축적 표제로 삼은 것과, 유리창에 빗방울이 튀었다가 흐르다가 번져 내리는 과정을 ‘작은 탄성’ ‘밀려나간 손짓’ ‘물빛에 잠긴 도시’라는 섬세한 감각으로 읽어내고 있음이 흥미로웠으나 지극히 소품에 머문 느낌이다. 앞으로의 정진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 이달균·박권숙 (대표집필 박권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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