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 수필의 과제와 잔망

2016.05.21 07:46

동아줄 김태수 조회 수:163

21세기 한국 수필의 과제와 전망

                                                                                            김 봉 군


Ⅰ. 실마리

1989년 7월 12일 밤 필자는 프랑스 대서양 쪽 디에프항에서 영국 남동부 뉴헤이븐항으로 가는 여객선 갑판 위에 있었다. 대서양 밤하늘의 찬란한 별빛을 바라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뒷날 아침 영국 뉴헤이븐에서 런던의 백토리아역까지 가는 열차 안에서 한 현명한 노인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중등학교 문학 교사 출신인 그 노인은 서점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역기능에 대하여 심히 걱정하였다. 고급 지성과 문화의 소통 체계가 파괴되고, 온당한 권위와 절대 가치가 붕괴되며, 교회가 공동화하는 현상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였다. 너무나 많은 텔레비전, 자동차, 스포츠 게임, 애인, 인터넷, 돈 때문이라 했다. 책 같은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그는 클래식 음악의 쇠잔과 지구의 오염까지 걱정하였다. 성(sex), 스포츠, 스크린, 스피드의 4S가 지배하는 바, 영상 매체 중심 다매체의 이 시대 문명사적 특성을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비관적인 미래학자들은 우리가 사는 지구에 대한 궁극적 소망을 버렸다. 우주과학자들은 2020년대부터 달나라로 이주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필자는 인류의 양심과 이성(理性)에 신뢰를 얹고 21세기 문학, 특히 수필의 과제와 전망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Ⅱ. 무엇이 문제인가

영국의 한 지혜로운 노인이 걱정한 것은 요컨대 ‘소통’의 문제다. 신유목민(neo-nomad)으로 불리는 인터넷 시대의 신인류와 ‘느림의 지성’, ‘느림의 미학’으로 감지되는 고전적 지식과 예술로써 소통하는 것은 지극히 어렵게 되었다는 뜻이다. 신세대의 지성과 예술은 대중화, 통속화의 트렌드로 방향을 튼 지 오래다.

키치(kitsch)나 캠프(camp), 칙릿(chiklit), 뉴 웨이브(new wave) 문학, 미니 픽션, 공포 문학, 사이버 문학, 엄지 문학 등 문학은 이제 그 양상을 사뭇 달리하게 되었다. 앨빈 토플러가 예견한 정보 혁명, 제3의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다. 그는 정보 혁명이 극성기에 들면, 문학의 경우 10인 정도의 소그룹 동인끼리 소통하는 현상이 일반화할 것이라고 했다.

우리 문단에도 그런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많은 문예지가 동인지화하고, 문인들의 자비 출판 풍조가 일반화해 간다. 문인의 애인마저도 작품을 읽지 않는다는 말까지 떠돌 지경이 되었다. 예술의 ‘자기 표현 본능설’이 지지를 받을 만한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쓰는 사람의 자족(自足) 행위(行爲)에 머물 위기에 처하였다는 말이다. 대학에서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학사   석사   박사 과정 학생들의 논문에 『문학동네』, 『창비』 외의 문예지는 거의 인용되지 않을 만큼 문학 작품 독서의 편식 현상도 심각하다. 왜 이럴까?

1966년 존스 홉킨스 대학교 심포지엄에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선언을 했다.


중심은 전체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것은(전체의 일부분이 아니므로) 전체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의 중심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 중심은 중심이 아니다.


해체론(deconstruction)을 선포한 대목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주장에는 ‘빛’과 ‘어둠’이 있다.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 계층의 민주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된다는 것은 ‘빛’이다. 아날로그 세대의 결점을 수정한 것이다. 반면에 상대주의의 절대화로 신성한 절대 진리, 곧 진리의 일률성(Einheit)이 무너지고, 문화가 찰나성과 경박성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은 ‘어둠’이다. KBS ‘열린 음악회’가 이를 잘 조화시키는 듯하더니, 최근 통속화에 심히 편향되어 가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어둠’은 존재의 신비성, 그런 ‘아우라’의 언어와 권위 상실의 그늘에서 현저히 짙어 간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디지털 문화에서는 중심 문화와 주변 문화, 고급 문화와 저급 문화의 역전, 혼효 현상이 빚어진다. 수필 문학가는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Ⅲ. 한국 수필의 현황과 과제


(1) 현황

 미국 시인 앨런 긴스버그는 ‘너무나 많은 것들’에서 너무나 많은 ‘공장, 음식, 맥주, 담배, 철학, 주장, 부족한 공간, 나무, 경찰, 컴퓨터, 가전제품, 돼지 고기’ 등을 열거했다. 너무 많은 것은 너무 적은 것과 같다는 뜻의 ‘과유불급(過猶不及)’은 우리 쪽의 성어다.

오늘날 우리나라 수필가는 너무나 많다. 단시간에 그 수효가 폭증했다. 널리 알려진 수필가 단체(동인)만 17개가 넘고, 문인협회에 등록된 인원만 2천5백여 명이다. 그래서 ‘너무나 많은 수필가’ 때문에 걱정하는 소리도 들린다. 구슬과 돌이 함께 타 버린다는 ‘옥석구분(玉石俱焚)’이 염려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걸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느림의 미학’을 본질로 하는 문학가가 너무 많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구슬과 돌을 가려내는 것은 문학사가 할 것이다. 역사에는 자정(自淨) 기능(機能)이 있다.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에 실린 작품 126편 가운데 ‘구슬’에 해당되어 역사에 남은 것은 5편 정도다. 수필가와 수필 작품은 많아도 좋다. 쓰고, 고쳐 쓰고 하는 가운데 일생에 명수필 한두 편만 남겨도 성공이다. 지금 발표되는 수필 가운데 수작(秀作)도 있고, 태작(莢作)도 많다. 그런 가운데 수필다운 수필의 길이 조금씩 열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혼란스러운 면이 많다. 이럴 때는 원점으로 돌아가 ‘본질론’, ‘수필의 시학’을 확립하여야 한다.


(2) 과제

 먼저 수필의 정의를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수필에 관한 국어사전의 정의(定義)는 모호하다. “일정한 형식이 없이 체험이나 감상·의견 따위를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적은 글.”이 그렇다. 피천득 선생은 “붓 가는 대로 쓴 글.”, 김광섭 선생은 ‘무형식이 그 형식적 특징’이라 했다. 이를 두고 한동안 논란이 많았다. 필자는 이런 주장들을 지양,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잠정적 정의를 시도해 보았다.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써도 될 만큼 세련된 문체와 구성으로, 사실에 바탕을 둔 농익은 체험의 세계를 예술적 상상력으로 형상화하거나 비판적 사유(思惟)의 세계와 지혜를 표출하는 통합 장르적 문학 형식이다. 서정 수필을 본격 수필로 하되, 서사적 수필  비평적 수필까지 포괄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련된 문체와 구성’, ‘농익은 체험의 세계’, ‘예술적 상상력으로 형상화’, ‘통합 장르적 문학 형식’ 등에 특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수필은 서양의 에세이와 공집합적 상통성이 있으나, 동일 장르로 묶기에는 문제가 있다. 우리의 경우는 동양적 장르와 서정·사유의 전통이 있고, 예술적 상상력의 비중이 크다. 서양의 경우는 지적, 철학적 통찰에 기울어 있고, 소논문까지 포함한다. 그럼에도 세계 문학의 보편적 장르 개념으로 볼 때, 우리의 수필도 에세이 장르에 합류할 수밖에 없다.


첫째, 세련된 문체와 구성으로 써야 한다.

가장 바람직한 수필의 문체에 적합한 숙어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다. 꿰맨 자국이 없는 바느질 솜씨다워야 한다. 수필이야말로 정확하고도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으로 씌어야 한다. 수필 문체는 간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장(sentence)의 기본 요소인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는 물론, 수식어를 최소화하여야 한다. 현란한 수식어는 문체를 화려하게 하나 속 비고 겉만 번드르르 한 ‘내허외화(內虛外華)’의 유혹에 빠지게 한다. 김윤식 교수의 『한국문학명작사전』에 뽑힌 유일한 수필인 김진섭의 ‘백설부’가 지나치게 현란한 수식어와 만연한 문체 때문에 더 읽히지 않는 것은 애석하다. 선불교(禪佛敎)에서는 현란한 수사를 기어(綺語)의 죄로 다스린다(필자는 불교 신자가 아님). 글쓰기의 초보자는 무엇을 쓸 것인가를 두고 애쓰며, 글쓰기의 고수(高手)는 무엇을 쓰지 말 것인가의 문제로 고심한다.

수필은 특별한 구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다. 모든 글쓰기에서 구성은 중요하다. 다음 인용문을 보자.


시에는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다. 처음은 그 앞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고, 끝은 그 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따온 대목이다. 언뜻 보아 참 싱거운 말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문학 장르의 플롯 이론으로서 중요한 진술이다.

수필의 첫 문장과 끝 문장은 무슨 말로 끝나야 하며, 그 중간은 무슨 말들로 채워져야겠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다만 그것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 천의무봉의 문체와 함께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수필은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유주현 선생의 수필 ‘탈고 안 될 전설’도 원작을 고쳐 쓴 글이다. 작가는 그 글의 문체와 구성이 적절한 서정성, 서사의 극적 강렬성, 여운의 효과를 내도록 퇴고를 거듭하였다.

필자는 수년 전 모 수필지에 서사 수필의 구성에 대하여 쓰면서 소설의 플롯 이론을 소개한 적이 있다. 노먼 프리드먼(Norman Friedman)의 『소설의 형식과 의미(Form and Meaning in Fiction)』에 실린 ‘플롯의 형식’ 부분이다. 그는 운명의 플롯, 성격의 플롯, 사고(思考)의 플롯의 큰 갈래 아래 13개의 작은 플롯을 제시, 해설, 예시하였다. 서사 수필을 쓸 때 참고할 만한 플롯 이론이다. 구인환 교수의 『소설론』에도 소개되어 있다. 수필가는 다른 장르의 비평 이론도 많이 읽어야 한다.


둘째, 사실을 바탕으로 한 농익은 체험과 예술 창조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수필에 제시된 사건과 장소와 시간, 사람은 허구가 아닌 사실이다. 그 사실을 설명적, 일차적 언어로 소개한 것만으로 수필 쓰기에 성공할 수 없다. 수필을 쓰기 위해, 작가는 일차적 사실 체험을 숙성시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인 조지훈은 1년이 넘는 숙성 기간을 거쳐 사실 체험을 ‘승무(僧舞)’라는 명시로 거듭나게 하였다. 그는 수원 용주사에서 승무(사실)를 처음 보았다. 그 감흥을 시로 적어 두고 거듭 생각을 가다듬었다. 덕수궁 미술 전람회에서 김은호 화백의 승무도에 접한 다음, 창조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마침내 시적 자아(내적 화자)의 농익은 체험, 창조적 상상력으로 ‘승무’라는 시 한 편을 완성한 것이다.

수필가도 이러한 체험의 숙성 과정을 거쳐야, 사실 열거에 지나지 않은 사수필(私隨筆)이나 신변잡기, 잡문의 차원을 벗어날 수 있다.

피천득 선생이 수필을 “서른여럿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라 한 것은 달력 연령보다 체험의 숙성도를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겠다.

러시아 형식주의 비평가들(Russion Formalists)의 모티프 이론은 이 경우에도 적용된다. 그들이 말하는 고정 모티프(bound motif)를 수필의 사실(fact)에, 자유 모티프(free motif)를 창조적 상상력의 내용으로 치환하면 된다는 뜻이다. 수필에서 일상적 사실 체험도 중요하지마는 예술적 상상력 또한 중요한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도 이 상상력 표출의 문제와 관련된다.


셋째, 존재의 본질 탐구에 정진해야 한다.

체험을 숙성시키기 위하여, 수필가는 사실이나 존재의 숨은 뜻 곧 비의(秘義)를 찾아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관찰하는 마음의 눈(心眼)을 세련시켜야 한다. 구상(具常) 시인은 주로 연작시 ‘초토의 시’, ‘밭 일기’, ‘까마귀’, ‘그리스도폴의 강’ 등을 쓰면서 줄기차게, 심혈을 기울여 개작(改作)에 개작을 거듭하였다. 그는 ‘촉발생심(觸發生心)’으로 결코 시를 쓰지 않았다. 이는 수필가에게도 필요한 덕목이다.

현상에 대한 표피적 관찰이나 감수성을 표출하는 것도 수필의 한몫이나, 그 현상의 내면에 숨겨진 본질을 탐구하는 수필은 독자의 심령을 움직이는 감동력을 확보한다.

앞에서 예를 든 구상 시인이나 소설가 이청준, 이문열 등의 작품은 그들의 개성과 함께 보편성, 항구성을 띤다. 소재 면에서 사회시이면서도 구상의 시 ‘까마귀’가 김지하의 ‘오적(五賊)’의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것도 본질 탐구와 현상 고발적 평면성과의 차이가 빚은 결과다. ‘당신들의 천국’, ‘잔인한 도시’의 이청준,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금시조’의 이문열이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이다. 수필도 다를 바 없다.

존재의 본질을 탐구하는 가운데 수필은 세계 문학사에 남는 명상록, 참회록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참회록 한 권 없는 한국 정신사에 수필이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블루 오션’이다. 박영준의 ‘종각’(기독교), 김동리의 ‘등신불’(불교) 같은 참회의 소설을 참조하는 것도 좋다. 한국 수필가들은 “예술이란 우리들 심령을 아프게 하는 그 무엇이다.”고 한 예술철학자 올드리치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존재나 우주에 대한 구도자적 명상과 사색이 요구된다. 수필가에게는 우주의 소리를 포착하려는 내공, 우주에 충만한 영적 파동에 감응하는 영성(靈性)이 있어야 한다.


넷째, 재미가 있어야 한다.

수필에 위트나 유머가 있어야 한다는 것은 선배 수필가들이 이미 지적하였다. 위트나 유머는 재미다.

재미의 차원에는 관능적, 감각적, 심미적, 지적인 것과 종교적 유열(愉悅)이 있다. 예술이 관능의 차원에서 재미를 찾으면 퇴폐에 빠진다. 절제되지 않은 감각도 저속해지기 쉽다. 본격 수필인 서정 수필은 심미적 차원을 지향한다. 피천득 선생의 말씀대로 ‘온아우미(溫雅優美)’한 절제의 미가 수필의 생명이다. 여기서 김정빈 선생이 강조하는 ‘무드’가 수필의 지배소(支配素)일 수 있다.

하르트만은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숭고미·비장미·우아미·골계미 등으로 나누었다. 본격 수필의 미적 속성은 우아미에 있고, 저속성을 떨친 골계미(위트, 유머)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후자는 에피그램적 성격을 띠어도 좋다. 어렵지만 숭고미를 되살리는 것 또한 우리의 꿈이다. 문제는 4S의 영상 문화 시대의 통속성과 속도, 찰나성에 길들여진 신인류와 어떤 재미로 소통하느냐가 문제다.


다섯째, 서정·서사·극적 양식의 특성을 통합해야 한다.

앞으로의 수필은 원시 종합 예술 시대의 통합적 양식을 지향할 것이다. 시적 서정성과 메타포, 이미지 등의 서정 장르, 줄거리가 있는 서사 장르, 극적 강렬성이 강조되는 극문학 장르의 특성이 통합되리라는 뜻이다. 여기에 철학적 사유의 세계와 범인류적 예지가 개입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스피드와 단순성을 도입한 대화체 문장과 만화적 속도감도 독자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여섯째, 우리다운 ‘수필의 시학’을 정립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앞에서 필자가 소박하게 시도해 보았으나, 이 정도로는 미흡하기 짝이 없다. 윤재천 교수가 주도하여 발간하는 『수필학』은 수필 시학의 정립에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수필 전문 비평가의 양성이 함께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일곱째, 우리 수필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보급하여야 한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주로 ‘받는 세계화’에 길들여져 있다. 이제 ‘주는 세계화’를 위하여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수필이 이에 앞장서는 노력이 요청된다.


Ⅳ. 전망 또는 맺음 글


21세기 수필의 주요 과제가 본격 수필의 올바른 좌표 설정과 소통의 문제에 있음이 이제 밝혀졌다. 제일 큰 문제는 디지털 시대의 신유목민인 신인류와의 소통에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블루 오션으로 수필은 문학의 중심권에 진입하였고, 종이 인쇄 수필과 사이버 수필은 공존할 것으로 전망된다. 사이버 수필은 종이 인쇄 수필의 엄숙주의를 회피하려 할 것이다. 이를 극복할 방법을 개발하는 것은 수필가 모두에게 짐 지워진 과제다. 전자 책, 하이퍼 텍스트와 쌍방 소통의 활용 등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 시대가 온 것이다.

스피드를 요구하는 디지털 문화 시대의 수필은 길이가 짧아야 한다. 200자 원고지 5장 수필론이 있었듯이, 8장 이내의 짧은 수필이라야 잘 읽힐 것이다.

요컨대, 10인 동인 시대로 전락할 것이라는 토플러의 예견에 맞서듯이, 많은 수필가와 수필 독자를 확보하는 길을 찾는 일에 다수의 수필 애호가들이 노력하는 우리의 모습은 매우 낙관적이다.

소재를 다변화하고, 우리 수필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세계에 알리는 일 곧 ‘주는 세계화’는 21세기 한국 수필계의 주요 책무다. 이를 위하여 우리 수필은 우리다운 개성과 함께 세계적 보편성, 시대적 항구성을 띠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모든 수필가는 그 내면에서 피나는 논리(로고스) 훈련을 하기 바란다. 이는 문학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가의 기본 자질로서 요구된다. 우리의 예술적 파토스, 디오니소스적 속성은 샤머니즘적 광기(狂氣)와 쉽게 결합한다. 우리 수필가는 로고스와 에토스로 내실을 다져야 한다. 영국의 이미지스트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히틀러의 파시즘적 광기에 동조하고, 대음악가 베토벤이 침략자요 대학살자인 나폴레옹을 찬양한 ‘영웅 교향곡’을 쓰다가 찢어 버린 것은 모든 예술가, 특히 우리 수필가에게 반면교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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