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란 무엇인가?

2012.05.19 10:42

동아줄 조회 수:539 추천:56


시인이란 무엇인가?

신경림


집으로 배달돼오는 시집이 하루에 꼭 한두 권은 된다.
계간지 등 시 전문지에 실린 시와 동인지까지 포함하면
내가 하루에 읽을 시는 백 편을 넘는다. 부담되는 분량이다.

하지만 나는 가능한한 읽는다. 물론 전부 읽을 수는 없다.
시집의 경우 대표작으로 보이는 몇 편을 뽑아읽고
전문지 등 잡지에 실린 시는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시인의 작품을
주로 읽는다.

몇편 뽑아 읽는 것으로 치우고 마는 시집도 적지 않다.
생동감도 활기도 없는 시집을 끝까지 읽을 인내심은 내게도 없다.
그러나 시를 읽는 즐거움을 어느정도 맛보게 해주는 시집도 적지 않다.
그 중에서도 정말 괜찮다, 그럴 듯하다고 생각되는 시집이면
따로 빼두었다가 뒷날 다시 읽는다.

일년이면 이런 시집이 적어도 열 댓권은 된다.
전문지, 잡지, 동인지에서도 이런 시는 종종 발견된다.
한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령 일주일이나 한달 뒤 그 시집을 다시 읽으면 괜찮기는 한데
무언가 울림을 주지 못한다.

최근에 읽은 시집이 거의 그렇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우선 시를 너무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 ‘시란 씌어지는 것이고 시인이란 태어나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시란 만드는 것,
이것이 오늘의 시인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이고,
시인 역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고 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다 시를 쓸 수 있고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재능을 의심하면서도 시를 공부하거나
계속 시를 쓰는 많은 사람들의 위안이 되는 소리요,
또 부분적으로는 맞는 소리이기도 하다.

조금 양보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인으로 셰익스피어를 연구한
벤 존슨(Ben Jonson)의 말을 인용, “시인이란 태어나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라고 말을 해도 구닥다리 소리를 면하기 어렵다.

"왜 시인은 피아니스트가 건반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안 보일 정도로
쌓는 훈련을 안 쌓아도 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한 어떤 시인의 질문이 본래의 취지와는
다른 쪽으로 편리하게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만들어도 억지로 만든다는 데 있다.
자연스러운 데가 없다는 뜻이다.
처음 읽을 때는 눈에 쉽게 띄지 않다가도 다시 읽으면 억지가 확연히
눈에 드러나고 또다시 읽으면 바느질자국까지 보인다.

나 자신 높이 평가한 바 있는 꽤 반응이 좋았던 어떤 시집은
처음 읽을 때는 참 근사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다시 읽으니 싫증이 나고 또 다시 읽으니 지겨워졌던 근래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 이것은 오늘의 우리 시에
거의 공통되는 것 같다.

젊은 시인이나 중견이나 마찬가지로, 세상의 흐름이 튀는 쪽으로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겠으나, 이는 요즈음 시인들이
정말 좋은 우리 시를 제대로 읽지 않은 결과라는 한 평자의 말은
귀담아들어야 할 것 같다.

한편 요즈음의 시에서 리듬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들도 하지만,
이 또한 시가 자연스럽지 못한 데 연유하는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시를 억지로 만들다보니까 오늘의 우리 시 중 많은 것들이 말장난으로
시종하고 있다.
물론 시에는 말장난이라는 요소가 분명히 있다.
말을 가지고 하는 예술에서 말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또 그것은 그 나름으로 매우 의미있고 재미있는 시적 동력이 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말장난이라는 것이 "이걸 몰랐지" 식의 천박한 발상에
그치거나 질 낮은 개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말장난이라고 할 수 없다.

말장난 자체가 적어도 시에서라면 읽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어야 하며
그 즐거움은 분명 천박한 발상이나 질 낮은 개그에서 오는 것과는 차이
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말은 경험의 축적이요 그 구체화로,
말장난에도 삶의 무게가 실려야 한다.

한데 요즈음 시들의 말장난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삶과는 아무 관계 없는 말들을 이리저리 뒤바꾸고 돌리고 비틀고 해서
말의 난장판을 만들어놓을 뿐이다.

젊은 시인이라면 모험심도 있고 감각에 의존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또 이해가 될 법도 한 일이다.
한데 나이 많은 시인들이 젊은이 흉내를 내며 경박한 말장난에
동참하는 것은 정말 역겹다.
이는 새로운 것을 향한 탐구정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문학저널리즘에의 영합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잇대어 생각나는 것은 가벼움이다. 가벼움이 우리 민족성과 맞는다는,
그래서 인터넷 시대는 바로 우리 시대이기도 하다는 우스개도 있지만,
요즈음의 우리 시(시뿐 아니라 문학 전반에 걸친 현상이지만)는
너무 가볍다.
또 너무 쉽게, 너무 함부로들 시를 쓴다.

나는 요즈음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이란 무엇인가" 라는
케케묵은 화두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았다.
다 알다시피 이것은 워즈워스(W. Wordsworth)와
코울리지(S.T. Coleridge)가 공동으로 낸 『서정담시집』
(Lyrical Ballads)의 제2판 서문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이 서문에서 워즈워스와 코울리지는 대답했다.
"시인이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보다 쉽게, 보다 힘있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나는 이 말을 시인의 특성을 한마디로 요약한
살아있는 명언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이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점이 과연 무엇인가.
시인의 특성으로 뛰어난 감수성과 상상력을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철학자나 과학자에게도 필수적인 것이다.
다만 비상히 발달한 언어능력이라는 점에 있어 시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다.

가령 앞의 정의에서 "쉽게" 라는 말 속에 정확하게,
분명하게 라는 뉘앙스가 있다고 읽을 때 뜻은 더 명료해진다.
시인이란 결국 남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사람이다.
시도 일종의 대화라는 뜻이다.
설명이 아니라 표현을 가지고 하는 대화니까
정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한데 요즘 읽는 시들 중 많은 것은, 비록 말장난의 시라고
말할 수 없는 것까지도, 표현이라는 개념도 대화라는 개념도 없다.
중언부언 도대체 요령부득인, 그래서 안이하고 탄력없는 시가
새로움이란 가면을 쓰고 난무한다.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떠들어도 되는 컴퓨터 탓이
없지 않을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말이 어찌 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유의 시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으로 시적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흠잡을 수 없는,
그래서 정말 그럴 듯 하다고 느껴지는 시도
대부분 울림을 주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사회성이 제거된, 거의 개인적인 문제로 시종하고 있는 시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부류의 시에 대한 평자나 독자의 관심의 경도 역시 70, 80년대의
사회성의 강조에 대한 반발로 여겨지는데,
과연 사회성이 사상된 시를 통한 삶의 추구가 가능할까라는 점도
생각해볼 대목이다.

물론 사적인 삶은 중요한 것이고, 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일 중의
하나가 개인적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이요 내면의 추구라는 사실을
굳이 경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혼자 사는 삶이란 있을 수 없다.
자기가 사는 삶인 만큼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삶일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남과 더불어 살게 마련인 것이 세상이다.

더욱이 말이란 사색이나 자아추구의 방법이기도 하나
본질적으로는 사회적 삶의 소산이다.
말에는 원천적으로 사회성이나 역사성이 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시를 가지고 개인적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시는 한없이 왜소해질 것이다.

실제로 우리 시는 지금 한없이 왜소해져 있다.
이런 시들이 몸을 던져 시를 쓰는 것과 거리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치열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독자에의 영합이 더 문제다.
시가 경박해지는 것도, 시를 너무 쉽게 쓰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도 남에게 하는 말인만큼 듣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다.
사실 독자가 없는 시처럼 비참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의식한다는 것과 영합은 전혀 다르다.
의식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마음을 열어놓고 있다는 뉘앙스를
가진 반면, 영합은 독자가 듣기 좋아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뜻이 강하다.

70, 80년대의 사회성의 시들은 어쩌면 또다른 형태의 독자와의
영합이었다는 혐의를 둘 수도 있으므로,
사회성의 시 자체에 독자와의 영합 내지 세속주의적 요소가 있는가의
여부는 한번 짚고 넘어갈 대목이다.

1998년 10월 일본의 카나가와(神奈川) 대학에서 동북아시아 문학에
대한 세미나가 있었다.
중국·일본·한국에서 평론가, 소설가, 시인이 각각 한 명씩
발표자로 나선 이 세미나에서 나는 "오늘의 한국시"를 주제로
얘기를 했는데, 청중의 하나가 한국시에 있어서의 절규성(絶叫性)이란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했다.

나는 그 개념이 분명치 않아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지만,
일본에서 나온 『현대시의 전망』(思潮社 1998)이라는 책을
그 뒤에 보니 이 문제가 주요한 화두였다.

일본시가 전체적으로 동인들끼리 즐기는 수공업예술의 수준으로
전락 왜소화한 가장 큰 원인은 시가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절규성의 상실에 있다는 지적이 있고,
한국시에는 아직 그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활기찬 문학이 되고 있다는
진단도 있었다.

최근에 나온 진보적 문학지 『신일본문학』에서도 눈에 띄는
시에 있어 절규성이란,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해보건대
문자 그대로 시는 본질적으로 부르짖음, 외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 같았다.

가령 우리가 살 수 없는 환경에 봉착했을 때 못 견디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더없는 기쁨에 처했을 때 환호하는 그런 기능과 성격이
시에는 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위험을 알리기도 하고
기쁨을 즐기게도 하는 것이
시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 특유의 탐미주의와 사소한 것에 대한 편집광적 집착으로
사회성이 사상되면서 일본시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시 쪽의 이 진단은 일본시에 관한 한 옳은 것이겠으나
한국시에 대해서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90년대 들어 우리 시에서도 그러한 절규적인 성격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절규성이라는 문제는 우리 시에서도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우리 시가 억지에 의해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말장난에 시종하고
사소한 것에 매달려 시 자체를 왜소하게 만들고 하는 것이
모두 절규성의 상실과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시가 안이하고 느슨해진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물론 우리가 막 들어선 싸이버 디지털 시대에
시가 옛날과 같은 형태로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대체로 활자매체에 의존해온 시에게 탈활자매체시대의 도래는
분명히 새로운 위기이다.

하지만 기계화와 대량생산이라는 산업혁명의 폭풍 속에서
시는 왕자의 자리를 산문에 넘겨주기는 했지만,
민중언어의 발견에 의해서 오히려 그 영역을 확대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극단적으로 개인화하고 파편화하리라 예상했던 인터넷이
오히려 전지구화하면서 국가간, 계급간의 빈부격차를 확대하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연결망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도
암시하는 바 크다.

시는 어차피 이상주의자의 길에 피는 꽃이다.
억지로 만드는 데서 벗어나 좀더 자연스러워지면서,
잃어버린 절규성을 회복하고, 왜소해짐으로써 놓친 큰 울림을
되찾는다는 일은 새로운 세기에 들어선 우리 시가 한번
시도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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